August 15, 2021

“최고의 복음” (The End of the Gospel)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5:9~11
Service Type:

“최고의 복음”

(The End of the Gospel)

8-15-21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5:9~11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Since we have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how much more shall we be saved from God’s wrath through Him!)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For if, when we were God’s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Him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how much more, having been reconciled, shall we be saved through His life!)

11 이 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Not only is this so, but we also rejoice in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reconciliation.)

[설교 요약]

            성도 여러분은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는 것이 즐겁습니까? 물론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늘 기쁘고 즐거운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주께서 약속하신 기쁨과 만족의 삶을 살아가는지를 우리 스스로 확인해 보는 것은 중요한 영적 자기점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하신 축복된 우리 성도의 삶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그의 피로 의롭게 된 자가 누리게 될 삶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복음인 것입니다.

이제 사도가 말씀을 통해서 밝히는 복음의 진수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복음의 진정한 특권인지?” (What are the genuine privileges of the gospel?)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는 것’ (Being saved from the wrath of God)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롬. 3:25)라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화목 되심을 설명합니다. 이것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v.9)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 (Being reconciled to God)입니다: 사도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v.10)이라고 우리의 영적 상태를 설명합니다. 우리 거듭난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유할 뿐 아니라, 그분을 ‘아바 아버지’ (롬. 8:15)라 부르며 화목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 (Being rejoice in God)입니다: 복음의 놀라운 약속은 “이 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v.11)고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영이 즐거워하는 것은 그분과 화목하는 것 이상의 충만한 은혜, 즉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복음의 특권이요 열매임을 사도는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받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로써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 나가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복된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는 것이 즐겁습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복된 신분의 삶을 살아가는 기쁨과 확신이 있습니까? 물론, 제가 지금 질문하는 것은 소설 ‘피터 팬’에 나오는 ‘네버랜드’ (Neverland)처럼 ‘어느 곳에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 땅’, ‘유토피아’와 같은 비현실적이고 다만 상적인 (=too good to be true) 크리스챤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주님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서 이미 성취되었고, 2천년 교회역사를 통하여 지금까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수로서 누려지고 있는 그러한 ‘기쁨과 즐거움’을 우리는 누리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말씀을 지난 한주 동안 묵상하면서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과연 저 자신은 이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음의 복을 누려 나가길 소망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더욱 화목된 평화를 누리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인간은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죄와 심판 아래 있다’고 우리 인간의 영적 상태를 <롬. 1~2장>에서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롬. 3장>에서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1)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한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롬. 3:22) 임을 그는 지적합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하셔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칭의) ‘하나님 아버지의 의’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를 처음으로 받게 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은 그분의 사도들이거나 혹은 초대교회 성도들 중의 한명이라고 그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2천여년 전 사람 바로 ‘아브라함’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민족의 혈통적인 조상일 뿐 아니라,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처음으로 ‘아브라함’을 그의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불러 주심’ (창. 15:6)을 사도 바울은 <롬. 4장>에서 영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도리어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롬. 4:20~22).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 한사람 뿐 아니라 그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취를 좇아 살아 가고자 하고 모든 영적 후손들에게 동일하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 (=축복)’을 주시고 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롬. 4:23~24). 이것이 <롬. 4장>의 요지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롬. 5장>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 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롬. 5:1~2)고 바울은 <롬. 5장>을 시작하면서 진술합니다. 그리고 <롬. 5:1~2>은 오늘 본문 <롬. 5:9~11>과 그 내용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내용이 더욱 구체화되고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롬. 4장>과 <롬. 5장>을 연결하는 <접속사> ‘그러므로’ (therefore)는 무슨 ‘그러므로’ 입니까? 이것은 <롬. 4장>의 결론부분에서 사도가 선언한 것과 같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뿐 아니라,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믿음으로’ (롬. 4:24)라는 의미가 ‘그러므로’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아브라함 한 사람 뿐 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가 여러분과 제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놓여서는 안되는 내용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기가 ‘성도가 누릴 영광과 은혜가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제 <롬. 5장>을 시작하면서 만약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그러므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v.1)고 우리를 격려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 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v.2)고 우리 성도가 계속해서 더 구체적으로 누리게 될 영적 충만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크리스챤이 누리게 되는 <영적 성숙의 변화>의 과정입니다. 그 첫번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과 평화하게 된 결과로서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요, 이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성도의 가장 축복되고 충만한 영적 상태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롬. 5:1~2>의 진술은 오늘 본문말씀 <롬. 5:9~11>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회의 대표적 리더의 한사람으로 평가받는 ‘존 파이퍼’목사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선포하시는 ‘최고의 복음’ (the end of the Gospel)이 무엇인지가 오늘 말씀 가운데 있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복음’ (The Gospel)은 ‘기쁜 소식’ (The Good News)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쁜 소식일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기쁜 소식에 대해 구체적인 영적 해석을 하면서 무엇이 복음의 진정한 특권인지?” (What are the genuine privileges of the gospel?)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는 것’ (Being saved from the wrath of God)입니다: 복음의 그 출발점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받게 되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향해 진노하시는 것일까요?’ 이점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미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 1:18)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해 진노하신 이유는 우리 인간들이 불의와 불경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의 불의와 불경건, 즉 하나님을 향한 불신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첫 인간 부부에게서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의심함으로서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는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우리 모든 아담의 후손들 중에는 단 한명도 예외없이 이런 하나님을 향한 불의와 불경건에서 벗어난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죄를 유전받은 인간의 불행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영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Whom God has set forth to be a propitiation through faith in His blood ~) (롬. 3:25)라고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든 인간의 죄의 저주를 모두 담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사랑과 권능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냥 말씀으로 우리를 용서하실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신구약 성경은 동일하게 하나님 조차도 그 죄에 대한 댓가지불 없이는 우리 인간을 용서하실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고 선언합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 조차도 온 우주만물 가운데 선언하신 ‘죄를 행할 때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그 공의의 법을 파기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피흘려 죽으신 중심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v.9)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선하신 피를 흘리고 죽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죄에 대한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게 하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엄중하신 진노하심을 이해합니까? 그분의 진노하심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쁜 소식인지를 여러분은 깨닫고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 (Being reconciled to God)입니다: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를 ‘복음’안에 들어 있는 놀라운 특권을 통해 계속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 특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거듭난 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의 대상으로 보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과 평화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v.10)라는 <10절>의 사도의 설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더 정확히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예수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 얻는 것’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따로 따로 일어나는 변화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것임을 우리는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신이 이러한 영적 사실을 이해했던 하지 못했던 상관없이 ‘내가 예수님을 영적하고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은 나의 죄를 예수의 피로 씻어 주셔서 그의 죄에 대한 진노를 없이해 주시는데, 이러한 나의 상태가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화목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그분의 진노에서 구원 얻는 것’과 별도로 설명하는 것일까요? 그 주된 이유는 저 자신을 포함해서 구원받은 성도들 중에서도 얼마나 그 구원된 자의 삶을 잘못 이해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복된 복음의 진리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모두 밝히고 나서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격려하면서 (롬. 12:1),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롬. 12:2)고 도전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을 본받고, 이 세대의 가치관을 좇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중심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 존재의식을 하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세상에 가치에 이끌려 자녀답지 못하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민족을 향해 하나님께서 거듭 거듭 그들이 영적으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신 핵심 메세지가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세상 가운데 헤매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된 평화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분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통하여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무관심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라는 친밀함으로 하나님과 화목된 평화의 관계로 깊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음으로써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이런 평화를 누립니까? 인격적 결단을 통해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이런 평화의 삶을 누립니까?

셋째,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 (Being rejoice in God)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로마서 강해> 설교 가운데 우리 성도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영적 상태를 <롬. 8:16>의 말씀으로 설명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영어로 ?!!)라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것은 단순히 앞절의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적 상태’를 재차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욱 충만한 영적 상태라고 주석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거듭난 자가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영적 상태가 바로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오늘 <11절> 본문말씀에서 사도가 밝히는 성도의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v.11) 우리 자신의 계획과 노력을 넘어선 주님의 약속하신 영,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한 확신 가운데 그 어떤 하나님의 선물 보다도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 우리 거듭난 성도가 누릴 최상의 영적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하나님께서) ~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0)고 선언하는 이유입니다. 이것 같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이 여러분과 제가 온 힘을 다해 반드시 누려야 할 최고의 복음이요, 성도의 삶의 진수임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성령의 은혜를 아직 충만하게 누리지 못한 구약의 성도들이었지만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그들에게 이렇게 감동적으로 선언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 8:10)라고. 그리고 400여년이 지난 다음 때가 되어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5,11)고 우리 성도가 누리게 되는 진정한 기쁨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기쁨임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예수의 피로 죄씻음 받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더 깊은 인격적 친밀함 가운데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그분을 즐거워함으로 약속하신 진정한 은혜를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