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8, 2018

“에브라임아 에브라임아” (Ephraim, Ephraim!)

Preacher:
Passage: 호세아서 (Hosea) 11:8
Service Type:

“에브라임아 에브라임아”

(Ephraim, Ephraim!)

1-28-18

본문말씀: 호세아 11:8

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How can I give up, Ephraim? How can I hand you over, Israel? How can I treat you like Admah? How can I make you like Zeboiim? My heart is changed within me; all my compassion is aroused.)

<서 론>

오늘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를 어찌 포기할수 있느냐?’ 라고 우리를 향해 되 묻으십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의 마음이 그 속에서 온전히 불붙듯 하다고 말씀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떤 아들과 딸 입니까? 그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며, 그의 뜻을 따라 온힘을 다해 살아가는 자녀 입니까? 아니면, 아버지를 안타깝게 하며 근심시키는 철 없는 자녀 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피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왜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는지를 이해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분명히 깨닫고, 좀더 그분의 아들과 딸의 신분에 합당한 철들고 그분의 기쁨과 자랑이 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

<본 론>

오늘 본문의 저자, 호세아선지자는 아모스선지자와 함께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년 전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왕국으로 있을 당시의 활동했던 선지자 입니다. 아모스가 남유다 출신이라면,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출신이었으며, 아모스는 <하나님의 정의>를,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 것으로 잘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일 것 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누구도 다 이해할수는 없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을 통해 자세하게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의 택한 자들을 통해서 말 입니다. 그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성품) 은 ‘정의’ 와 ‘사랑’ 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4) 라고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 하였고, 호세아는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호. 11:8) 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대언해서 선포한 것 입니다. 특별히 오늘,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듯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함께 묵상해 보면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대한 나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되돌아 보고 깨닫는 시간되길 기대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먼저 ‘에브라임’ 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에브라임’ 은 누구 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하나님이 부르시는 대상, 에브라임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스라엘’ 은 익숙한데, ‘에브라임’ 은 생소해 합니다. 에브라임은 누구 일까요? 먼저, 우리가 잘 아는데로 ‘에브라임’ 이라는 이름은 요셉의 둘째 아들의 이름 입니다. 그는 첫째 아들 ‘므낫세’ 에 이어서 출생한 아들이었고, 야곱은 자손들을 축복할때 장자 므낫세보다도 에브라임에게 더 큰 축복을 누리게 될 (=실질적 장자권을 누릴) 자로 예언 하였습니다. (창. 48:17~20) 그리고 ‘에브라임’ 이라는 이름의 뜻은 히브리말로 ‘창성함’ 이라는 의미 입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 요셉이 형들의 미움으로 인해 애굽상인에게 종으로 팔려 가서 모든 어려움과 위험의 순간에도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주시고 함께 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창. 41:52) 라고 둘째아들의 이름을 지은 이유인 것 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에브라임’ 은 그 한 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큰 민족을 이루게 되는 ‘에브라임의 후손들’, 아니 북이스라엘 민족전체’를 의미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특별히 호세아가 선포하는 메세지를 받는 ‘북이스라엘 왕국’ 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 였던 것 입니다. (렘. 7:15) 따라서, ‘에브라임’ 이라는 이 이름은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과 함께 북이스라엘을 구성했던 이스라엘 10지파를 통털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할수 있는 것 입니다. ‘남왕국’ 을 유다로 부르는 것처럼, ‘북왕국’ 을 이스라엘 혹은 에브라임이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 따라서, ‘에브라임’ 은 ‘단순히 에브라임 후손’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왕국의 모든 백성’ 들을 뜻 하는 것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하나님은 왜 에브라임을 안타깝게 부르시는 것인가?’ (Why does the Lord call Ephraim with groaning which cannot be uttered?) 를 살펴볼 차례 입니다;

첫째, 에브라임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Because Ephraim does not repent his sins): 하나님께서 에브라임, 즉 북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말할수 없는 탄식 가운데 안타깝게 부르시는 그 중심에는 그들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 일것 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의 문제의 중심에는 ‘불신’ (unbelief) 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불신’이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벗어 났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가장 쉽게 말한다면,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의무의 관계에 있다는 뜻 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왜 ‘율법주의’ (legalism) 을 그토록 강하게 경고한 이유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언제나 ‘그분과 사랑으로 순종하는 자발적인 인격의 관계’ 를 형성하지만, ‘율법주의’ 는 언제나 ‘의무감과 형식주의’를 낳게 되는 믿음의 적이기 때문 입니다. 이것만큼, 신앙의 적은 없습니다.

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그것은 내가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처음으로 거듭나게 되는 순간 뿐 아니라, 주님을 다시 볼때까지 언제나 우리 성도의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하기 때문 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8,9) 라고 사도요한은 우리를 격려하고 도전 합니다. 바로 믿지 않는 불신자가 아니라, 우리 믿는 크리스챤을 향해 ‘우리 죄를 자백하자’ 고 힘주어 주장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죄 짓지 않는 것이 아님을 내가 인정한다면, 우리는 겸손하고 진실함으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과 실수를, 육신으로 저지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할 것 입니다. 이렇게 될때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도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 6:6) 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제사가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과 그분을 인격적으로 알아 나가는 ‘산제사’ 의 삶을 살게 될것 입니다. 에브라임은 그무엇보다도 바로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않은 굳은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 것 입니다.

둘째, 에브라임은 ‘육체의 욕심을 좇았기’ 때문 입니다 (Because Ephraim live by the desires of his sinful nature): 첫번째로 죄를 회개하지 않을때, 두번째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관계라고 말할수 밖에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 과 ‘육체의 욕심을 추구’ 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와 같은 것 입니다. 호세아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에브라임’ 을 향해 선고하시는 죄가 무엇인지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육체적인 타락 (1,2장) 과 우상숭배 (3~5장) 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에 가서 그녀와 결혼하고, 자녀를 낳게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 호세아와의 부부의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간음하고 육체적인 타락을 거듭 거듭 행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타락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를  ‘타락한 고멜과 의로운 남편, 호세아의 관계’ 로 상징해서 보여 주십니다. 호세아서의 주제에서 볼수 있드시 하나님은 이런 호세아에 대한 명령을 통해 ‘음란한 아내, 북이스라엘 민족과 의로우신 남편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대조적으로 밝혀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에브라임’ 이라고 통칭되는 ‘북이스라엘민족’ 이 오늘날 누구를 의미하느냐는 구체적인 질문을 해 볼때 이것은 한마디로 대답할수 있는 것은 아닐 것 입니다. 말하자면, ‘에브라임’ 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 인가?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 인가? 하는 식의 질문 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볼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그의 자녀라고 이해할수 있을 것 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하실 것을 약속 하신 것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자 그대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 을 말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사야서의 글 (사. 10:22) 을 인용해서 이렇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7) 라고 말 입니다. 모든 구약의 이스라엘민족이 구원받은 백성은 분명 아닌 것 입니다. 결론은 무엇 입니까? ‘누가 에브라임인가?’ 라는 중요한 질문에 대한 지혜로운 접근법은 ‘구원받은 자다’ 혹은 ‘구원받지 못한 자다’ 라는 식의 2분법식의 접근이 아니라, ‘현재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자기인식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외형적인 모습은 오늘날의 불신자의 모습보다는 교회다니는 교인들의 모습에 더 가깝기 때문 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교회에 해당하는 유대회당이 있었고, 목회자에 해당하는 제사장들이 있었고, 여러 신앙적인 행위에 해당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볼때 그들은 육체의 정욕과 우상숭배로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것 입니다. 이들이 구원 받았냐 받지 않았냐는 질문도 신학적으로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질문은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갈수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에 응답할수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결코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로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아야만 하는 것 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7) 고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도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 가운데서 해방 되었다’ (롬. 8:2) 는 뜻 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서 해방되었다는 뜻은 죄를 갈망하는 우리 육신의 욕심에 끌려서 어쩔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갈망하는 욕심을 거부하고 죄를 이길수 있는 능력이 우리 가운데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 입니다. 에브라임은 안타깝게도 죄를 거부하고 물리친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그것을 즐긴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육체의 욕심을 거부하고 싸워 이겨 나가고 있습니까?

셋째, 에브라임은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Because Ephraim does not let the Spirit reign him):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계속해서 에브라임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오늘날의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많은 영적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 입니다. 저는 이제 3번째 적용을 통하여 에브라임은 믿지 않는 불신자 뿐 아니라, 믿고 거듭난 성도들에게 큰 도전과 격려를 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혼한 신랑이 신부를 대하듯 에브라임을 대하고 계시기 때문 입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해 주기를 요청하는 프로포즈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백년해로’를 기약한 부부가 되어 지아비로서 지어미에게 그 간절한 사랑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우리 성도와의 영적 합일의 관계는 구약성경 뿐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까지도 성도와 하나님과의 영적 합일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고도 본질적으로 설명했다고 믿기 때문 입니다. 마치 신약성경에서 교회공동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 사도바울이 비유했드시, 이 에브라임과 하나님의 관계는 바로 거듭난 성도와 하나님의 영적 관계인 것 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해면서 성도 여러분에게 도전하기 원하는 것은, ‘도데체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자는 어떤자인가?’ 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 본다면,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출발이 내 계획이나 의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님을 인정 할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신 계획하심 때문임을 우리는 깨닫아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온것이라면, 나의 자녀됨의 모든 과정도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완성되어야 함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 입니다. 우리는 결코 교회의 문제 많은 교인들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판단해서는 않될 것 입니다. 물론 그런자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거듭난 성도들이 자신의 신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질 영광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안따깝게도 많은 거듭난 성도들이 자신에게 주어질 영광된 자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욕심을 좇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성도들을 향한 깨우침이요, 도전 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제자들이 받게 될 약속하신 성령님에 대해 이렇게 설명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것만 말씀하실 것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도 너희에게 말씀해 주실 것이다” (요. 16:13) 고. 호세아서에 나오는 고멜과 같이 심한 육체적 타락과 우상숭배에 빠진 정신 못차린 자들 뿐 아니라, 겉으로 볼때는 경건해 보이고 착실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처럼 보일찌라도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할때, 결코 하나님의 자녀의 충만한 삶을 살아갈수 없는 것 입니다. 오직 약속하신 진리의 영,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될때 여러분은 죄를 이기고 약속하신 열매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요,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 가운데 예비하신 삶인 것 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그 불붙듯 하는 사랑을 이해 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영으로 이해하신다면 우리는 호세아와 함께 이렇게 고백해야 할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 (호. 6:3b) 고. 왜냐하면, 선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더욱 알아 가면 갈수록 약속하신 성령님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을 더욱 깨닫게 될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깨닫은 만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녀의 확신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 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풍성하신 사랑과 은혜가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충만을 통해 성도 여러분의 삶에서 날이 갈수록 완성되어 가시기를 소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