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 2017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 (The joy of the Lord)

Preacher:
Passage: 느헤미야 (Nehemiah) 8:6,8~10
Service Type: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

(The joy of the Lord)

10-1-17

본문말씀: 느헤미야 (Nehemiah) 8:6,8~10

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매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론>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가장 잘 요약하고 정의한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에서 ‘소요리문답’ 의 가장 첫 질문과 대답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냐?’ 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 이라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인간의 ‘의무사항’ 이나 ‘책임’을 넘어서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축복의 통로임을 알수 있습니다.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그 깊이 뻣은 뿌리로 충만한 물을 공급받아 푸르른 잎파리와 풍성한 열매를 맺듯,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 함을 통해 우리 인간은 삶의 의미와 생명의 충만한 힘을 공급받는 것 입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10) 라고 선언한 이유일 것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자발적인 사랑으로 그분을 기뻐하고 즐거워 함으로 삶의 진정한 이유와 힘을 날마다 하나님으로 공급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 합니다.

 

<론>

오늘 본문의 ‘느헤미야서’ 는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참혹하게 멸망당하고,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갔다가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 때에 사로 잡혀 갔던 여러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느헤미야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것이 바로 느헤미야서 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당시 <느. 1장> 에도 언급되 있드시, 아닥사스다왕 시대에 왕의 신임을 받던 ‘술 관원’ 이었는데, 아닥사스다왕 20년에 <유대총독> 으로 임명받아 예루살렘으로 보냄을 받고,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호론사람 산발랏과 암몬사람 도비야 등과 같은 악한 무리의 모든 모함과 방해를 이겨내고 마침내 귀환한 이스라엘백성과 하나가 되어 마침내 무너졌던 예루살렘성벽을 중건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벽’ 을 다시 건축한다는 뜻 이상을 의미 합니다. 그것은 바로 무너지고 파괴된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에 대한 옳바른 신앙을 다시 세워 나감을 의미 합니다.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 세상의 유혹과 향략에 빠져 오랫동안 방황하고 심한 고생을 한 연후에 비로소 자신이 자라고 커왔던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를 깨닫은 ‘돌아온 탕자’ 와 같이, 오랫동안 강대국 바벨론과 앗시리아의 압제아래 비참한 노예살이 하면서 이스라엘민족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시고 품어 주시던 그 은혜가 얼마나 소중했던 가를 깨닫게 된 것 입니다. 따라서, 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 은 ‘이스라엘민족이 똘똘 뭉쳐서 이제 다시 뭔가를 할수 있게 되었다’ 는 의미가 아니라, ‘완전히 망하고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자녀들을 반드시 그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건져 내시고, 어떤 악한 자의 방해 가운데서도 그분의 성 예루살렘 성벽뿐만 아니라 무너졌던 그분에 대한 참된 믿음까지도 그의 백성의 삶 가운데 다시 세워 주셨다’ 는 의미 임을 우리는 니헤미야서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울수 있었던 것은 결코 니헤미야나 몇몇 이스라엘 지도자의 리더쉽이 탁월해서도, 혹은 그들 민족들이 똘똘뭉쳐서 적들을 물리칠수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들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강력하신 손길 때문인 것 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강한 손길로 인한 결과라고 말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루살렘성전 복원’ 의 몇가지 사건들과 그에 따른 자세한 기록을 살펴만 보더라도 우리는 어럽지 않게 그것을 알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던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하신 약속을 응하게 하시고자 페르시아 고레스 원년에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스룹바벨과 예수아등,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할 것을 명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1 귀환> 입니다 (BC 538). 이 성전 재건은 일시중단 되었다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백성들을 격려하여 마침내 BC 516 (예루살렘 함락 70년만에) 에 완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둘째, 성전재건이 완성되고 나서 60 뒤인 BC 458년에 아닥사스다왕의 명으로 에스라와 여러 이스라엘백성들의 <2 귀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셋째로, 오늘 본문의 느헤미야가 에스라의 2차귀환 13 후인 아닥사스다왕 임기 20년째에 <3 귀환> 을 하게 됩니다 (BC 445).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무너진 예루살렘성을 다시 세우기 90여년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의 고레스왕과 아닥사스다왕의 마음을 감동 시키심으로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던 이스라엘민족의 귀환이라는 기적과 같은 이 일을 시작하신 것 입니다. 그 사이 사이에 얼마나 많은 적들의 방해와 공격이 있었는지를 다 여기서 언급하기에는 시간이 부족 합니다. 그것이 소상하게 기록되 있는것이 ‘에스라서’ ‘에스더서’ 그리고 ‘느헤미야서’ 인 것 입니다. 저는 감히 이스라엘민족의 100여년 가까이에 걸친 귀환사건에서 만약 단 한번 이라도 하나님의 강하신 손과 철저한 돌보심이 없다면, 이들의 ‘하나님의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 복원은 고사하고라도, 조국땅에 귀환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 드릴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고레스왕이 명을 내려 스룹바벨과 예수아등의 지도자로 하나님의 성전을 복원한 것에서 부터 90여년 후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복원하기까지가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임을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진실된 기록을 검토해 보면 볼수록 시인하지 않을수 없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예루살렘의 총독이었던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마무리 하고 나서 (느. 6장)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영적으로 잘 묘사해 주고 있는 것 입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이스라엘민족의 지도자들을 다시 세웁니다’ (느. 7장). 컴퓨터의 외적인 조건을 만족시키는 ‘하드웨어’ 를 구축 했다고나 할까요? 백성들을 이끌어나갈 지도자들을 다시 세우고, 조직을 정비해 나가는 것 입니다. 그리고 나서, 둘째, ‘소프드웨어’ 에 해당하는 ‘우리 인간 내면의 혁신’을 시도하는 것 입니다. 바로 ‘영적 회개와 회복’ 인 것 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긴 시간동안 하나님을 떠나 세상 가운데 방황하며 죄로 인해 고통 당했던 그의 자녀들을 하나님은 때가 되었을때 그들의 ‘죄에 대한 회개와 그 죄에서 돌아설 것을 결단’ 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의 삶을 다시 살아가는 영광을 허락하시는지를 감격스럽게 목격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한 <느헤미야 8장 전체> 에서 특별히 ‘영적 부흥’ 은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이끄심에 기초하고 있고, 그렇다고 우리 인간들은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진리와 구원의 은혜에 민감하게 반응 함으로 그 역사는 일어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부흥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How does the spiritual revival happen for our Christians?) 이것을 ‘느헤미야 8장’을 중심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입니다 (It may happen when the Words of God proclaims): (느. 8:1~6)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총독이자, 영적 지도자인 느헤미야가 진정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민족의 영적 부흥의 역사’ 였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압니까? 그것은 <느. 6장> 후반절에서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 을 완공하고 나서 그가 행한 것을 볼때 잘 알수 있습니다. 그는 ‘성벽완공’ 후 느헤미야는 결코 성벽완성 자체에 만족하거나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그는 조금전에 말씀드린데로 <느. 7장> 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들을 세우고 나서, 그가 진정으로 목적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민족의 ‘영적부흥’ 을 조금의 지체함없이 <느. 7장> 마지막절 (v.73) 에서 시작하여 <8장> 전체에서 구체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 입니다. 따라서,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재건’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뒤에 이루어질 ‘영적 부흥’ 을 위한 전주곡이라고 정확히 말씀 드릴수 있을 것 입니다. à 느헤미야는 그 영적 부흥을 이루기 위한 첫단계로서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하게’ 했습니다. 그는 율법학사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율법책을 가져오게 하여 말씀을 알아들을 만한 모든 남여 앞에서 읽게 했습니다’ (1~5). 그는 수문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알아들을 (=성인) 만한 모든 남자와 여자들 앞에서 말씀을 읽었고, 그들은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수문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백성이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v.3) 라고 그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부흥의 시작’ 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 그 자체에서 부터 옮을 이해하게 됩니다. 어떤 인간의 도덕과 선행과 가치관의 새롭게 하고자 하는 계획이나 스스로의 점검 이전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이 그대로 선포되어지는 곳에서 부흥의 역사는 시작됨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영적 부흥을 경험 하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때 겸손함과 진실함으로 그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사모함으로 말 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즐거워 합니까?

둘째,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이 있을 입니다 (It may happen when we have right ‘Bible interpreters’, and recognize the meaning of the Words): (느. 8:7,8) 저는 우리 성도가 영적 부흥을 이루기 위한 조건으로서 ‘말씀이 선포된 곳에는 그 말씀에 대한 옳바른 영적 해석’ 이 뒤따라야 함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강조하기 원 합니다. 요즘 <매일성경 큐티말씀> 으로 보게되는 본문말씀이 ‘예레미야서’ 입니다. 큐티하신 성도 여러분은 잘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임박한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준엄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도 느꼈을 것 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민족의 죄악은 말씀을 잘 모르는 일반 백성들 뿐 아니라, ‘종교지도자’ 라고 하는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 까지도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 입니다. 소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자처하는 종교지도자들’ 이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거역할때, 그 악한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불보듯 분명한 것 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 ~ 평안하다, 평안하다” 고 거짓예언하는 자들의 받을 심판의 준엄함을 크게 선포했습니다. 지금은 편안한 것이 아니라, 안전한 것도 아니고, 진정으로 불안하고 죽음과 심판이 바로 문 앞에 다가와 있는데, 거짓 선지자는 ‘하나남의 말씀’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고, ‘평안하다, 평안하다’ 고 거짓예언을 하는 것 입니다. 특별히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 말씀공부를 리더하는 자들은 언제나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받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때, 그들은 반드시 ‘실족케 된자의 핏값을 그에게서 찾겠다’ 고 하나님은 경고 하시는 것 입니다. 성도들은 특별히 자기의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고 인간적 관점에 편승한 귀를 즐겁게 하는 자들의 말씀해석에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옳바른 말씀해석은 언제나 옳바른 영적 각성과 진정한 회개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 입니다. 사도요한은 “ ~ 영을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일. 4:1) 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 여러분은 주일날 설교뿐 아니라, 인터넷과 책자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듣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등 여러 성경학사들을 통해 에스라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해석해 줌으로 그들이 그것을 다 깨닫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 레위 사람들이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v.7,8) 고 느헤미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바른 말씀의 해석을 통해 점점 더 진리에서 자라나고, 옳바르지 못한 거짓 영들을 분별할수 있는 영적 지혜를 주님께 받기를 간절히 소망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분별의 영을 통해 깨어 있습니까?

셋째, ‘죄에 대한 각성과 참된 회개가 뒤따를 입니다 (It may happen when we have a spiritual awakening, and confess our sins): (느. 8:9~11) 사실 저는 ‘영적 부흥’ 을 가져오는 이 세번째 단계는 앞의 첫번째와 두번째의 단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말은,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먼저 선포되고, 그 말씀을 성경적이고 건전한 교리적 해석을 통해 바로 풀어 해석’ 되어진다면, 여러분과 저는 ‘회개와 영적 각성’ 을 할수 있는 ‘은혜의 문’ 에 와 있다고 말씀 드릴수 있을 것 입니다. 그만큼 말씀과 옳바른 성경해석은 그만큼 영적 부흥에 필요한 선행조건 입니다. 그러나, 세번째의 ‘회개와 영적각성’ 이 단순히 ‘말씀선포와 바른 성경해석’ 을 통해서 자동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지나친 낙관주의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금전에 말씀드린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였던 예레미야가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과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했고, 또 그 뜻을 정확하게 해석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을 온전히 선포하시고, 그뜻을 자상하게 풀어 설명해 주셨지만, 특별히 성경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던 율법학자,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고, 더 나아가 영적 각성을 하기는 커능 도리어 진리를 전하는 예수님을 더욱 미워하고,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던 것 입니다. 무엇이 문제 입니까? 말씀이 잘못된 것 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들과 더더욱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세가 부족해서 입니까? 전혀 그렇치 않습니다. 문제는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 입니다. 그들의 완악한 마음과 곧은 목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까지도 거부하게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번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마. 11:15) 고 선언 하셨습니다. 누가 들을 귀가 있는 자일까요? 그는 ‘겸손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을 가진 자 입니다. 곧은 목과 굳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상관없다!!’ 고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무관심한 자가 아닙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우는지라” (v. 9) 고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영적 각성 되어짐을 묘사 합니다. 진정한 말씀선포와 상한 마음이 만날때 회개와 영적 각성은 언제나 불붙듯 일어났음을 우리는 2000년 교회역사를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회개와 영적 각성을 경험 하셨습니까?

넷째, ‘하나님을 즐거워 할때 입니다 (It is happen when we enjoy God): (느. 8:12~18) 말씀의 진리와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느헤미야는 오늘은 너희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v.9,10) 고 말합니다. 이말은 무슨 뜻일까요? 회개하지 말고, 마음에 죄에 대한 애통함을 가지지 말라는 뜻 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5:4) 라고 하심으로 죄에 대한 참된 회개와 애통하는 심령 가운데 임하는 참된 위로를 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백성들이 근심하지 말고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 때문 인것 입니다. 이들이 이 말씀의 진리와 자신의 영적 상태를 깨닫은 시기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심을 기념해서 지키게 하신 ‘초막절’ (=나팔절) 이기 때문 입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에서 날이기에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인하여 진정한 영적 각성’ 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과거의 죄로 인한 후회스러움과 패배의식에 빠져서는 않된다’ 는 것 입니다. 더 이상 슬픔과 무거운 죄책감에 눌러 앉아 있어서는 않되고,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함으로 이제는 참된 기쁨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 라고 고백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과 저의 참된 힘이기 때문 입니다.

 

<론>

우리의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은 우리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 이라고 여러분과 저에게 어떻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을 이루고, 열매맺는 삶인지에 대한 소중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의 힘 입니다. 이것을 영으로 깨닫을수 있는 사람은 축복된 사람일 것 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대한 옳바른 해석으로 깨우침을 받고,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내게 주신 깨닫음을 통한 참된 회개 가운데 이제는 날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의 삶이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