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6, 2022

“옛사람과 새사람” (I) (The Old Man & The New Man)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4:22~24
Service Type:

“옛사람과 새사람” (I)

(The Old Man & The New Man)

3-6-22

본문말씀: 에베소서 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That you put of concerning the former conversation the old man, which is corrupt according to the deceitful lusts;)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And 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hat you put on the new man, which after God is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

[설교 요약]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요약될 수 있는 오늘의 말씀은 사도가 4장을 시작하면서 성도를 향해 도전했던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것은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가기 원한다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옛사람’과 ‘새사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도가 의미하는 ‘옛사람’이라는 것은 ‘예수 믿고 거듭나기 전에 부패한 본성에 의해 지배 받았던 우리의 인격’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6)라고 그는 선언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될 때, 우리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목 박힌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사도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도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크리스챤의 옛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만약 옛사람이 죽지 않은 불신자들의 경우는 옛사람 속에 역사하는 죄의 힘에 지배 받음으로, 그것을 벗어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죄와 사망의 힘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해방되었기에 더 이상 아담으로부터 유전 받은 죄의 부패한 본성을 지닌 옛사람에 지배되지 않는 것입니다 (롬. 8:1-2).

여기서 우리 크리스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사도의 가르침은 ‘내가 예수 믿는다고 자동적으로 옛사람을 벗게 된다’고 사도가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오히려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강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사람”이란 무엇입니까?

‘옛사람의 특징’은 불신자 (=이방인) 속에서 역사하는 헛된 ‘생활방식’ (the way of life)입니다. 그 특징은

  • ‘허무함’ (emptiness)입니다: 그 마음의 허망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v.17)
  • ‘어두움’ (darkening) 과 ‘굳어짐’ (hardening)입니다: 불신자는 그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 마음이 굳어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v.18). 그리하여, 수치의 감각을 잃고 방탕에 자신을 내 맡기서 더러운 욕심을 행하는 것입니다 (v.19)

이와 같은 불신자를 지배하는 옛사람을 벗어나라고 사도는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어떻게 우리 성도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설교 전문]

            사도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그의 글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점점 더 영적으로 깊고 구체화되는지에 대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바울신학의 진수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사도가 우리 크리스챤의 실존을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놀랍게 꿰뚫어 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함께 에베소서 4장 이후의 ‘후반부’를 시작하면서 지난 2번의 설교를 통해 살펴 보았듯이, 사도는 <1~3장>에 해당하는 전반부의 주제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런 신분’을 깨닫았다면 이제 어떻게 그것을 삶에 적용할 것인가를 도전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라고 4장을 시작하면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영광스러움을 깨닫았다면, 그럼으로 이제부터는 이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자’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더 이상 영적으로 어린 아이가 되지 않고,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바로 겸손과 온유와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주님의 몸인 교회공동체 안에서 함께 장성하게 자라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요약될 수 있는 오늘의 말씀은 사도가 4장을 시작하면서 성도를 향해 도전했던 말씀의 결론임을 우리는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도가 4장을 시작하면서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 성령에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v.1-3)는 말씀에 대한 최종적 (=결론적)으로 연결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가기 원한다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하나되게 된 우리 성도의 구체적인 실존이라는 뜻이요, 부르심의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점이 왜 제가 사도의 글이 이토록 논리적이고 놀라운 영적 통일성을 가지고 말씀을 더 깊고 실존적으로 전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감탄하게 되는 점입니다. 그는 실로 긴 호흡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최종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옛사람’과 ‘새사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바울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의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옛사람’과 ‘새사람’입니다. 먼저 무엇이 ‘옛사람’ (old man)입니까? 여기서 <옛사람>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전에 부패한 본성에 의하여 지배 받았던 중생하지 못한 인격’을 뜻합니다. 사도가 의미하는 ‘옛사람’이라는 것은 ‘예수 믿고 거듭나기 전에 부패한 본성에 의해 지배 받았던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질문은 ‘우리 크리스챤은 아직도 옛사람에 속하여 살아가는 자인가?’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6)라고.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다’는 뜻은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곧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했을 때, 나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이해했다면, 다음 질문은 ‘그러면 왜 사도는 우리 성도들에게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도전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 믿는 순간, 곧 거듭난 순간에 나의 옛사람이 죽게 되었다면 구태어 왜 내가 옛사람을 벗어버릴 (=죽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먼저, ‘옛사람’이라는 말의 영어 단어가 ‘old man’이듯이 이 옛사람은 매우 오래된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로 오래 되었느냐 하면, 그 시작이 첫 사람, 아담에게서 부터 유래될 만큼 오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원죄’ (the original sin)을 범함으로 이 옛사람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옛사람은 아담의 후손, 곧 모든 인류에게 단한명도 예외가 없이 유전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아담에 속한 죄의 원죄를 물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이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표현대로 한다면, ‘옛사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조금 전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왜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도전하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오직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만이 옛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예수 믿지 않음으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이지 못한 불신자는 결코 스스로 옛사람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가 강조하는 핵심은 ‘우리 성도가 옛사람을 벗어야 하는 이유는 이미 옛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이제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사도가 우리 성도들에게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은 아담으로 물려받은 옛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이 옛사람은 이미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옛사람은 무엇입니까? 이 옛사람은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전에 부패한 본성에 의하여 지배 받았던 중생하지 못한 인격’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믿고 나의 신분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부패한 죄에 빠질 수 있는 나의 육신에 속한 본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여기서 말하는 ‘옛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에 지배되는 옛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과거의 타락한 본성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성도의 육신에 속한 성품 (=존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점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로이드 존스’가 오늘 본문을 강해설교하면서 사용했던 예증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미국의 남북전쟁이 벌어진 후 노예로 살아가던 흑인들이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특히 남부에 있던 흑인들은 자신이 노예로 살아가는 삶이 더 자연스러웠기에, 이제 자유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여전히 과거 노예로 살아가던 때의 삶의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예 생활하면서 가졌던 겁 많은 정신과 두려워하는 생각에 여전히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헌법이 그들을 완전한 자유인이라고 보장하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미국의 헌법을 통해 법적으로 정당하게 그들의 지위를 보장받았지만, 불쌍하게도 과거의 습관과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사람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라고 로이드 존스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제부터는 죄에서 자유하게 된 자 답게 과거 우리를 지배하던 부패한 죄의 본성에 지배 받기를 거부하고, 그 옛사람의 사고방식을 벗어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옛사람입니까?’ 우리가 유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사도가 4장에서 ‘옛사람’에 대한 특성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17~19절>에서 묘사된 ‘이방인’ (=불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대표적 특징들입니다. 이것은 첫째, 자기중심의 ‘허망함/허무함’ (emptiness/vanity)이 그것입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v.17)는 것입니다. 아무리 배워도, 아무리 가져도, 아무리 쾌락의 끝을 추구하여도 더욱 더 밑바닥에서 강렬하게 올라오는 그 허무의 쓴맛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허무에 대한 시나 노래…) 둘째로, ‘어두워짐’ (darkening)과 ‘굳어짐’ (hardening)입니다. 사도는 계속 고발합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어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v.18)라고. 그 결과는 “수치의 감각을 잃고, 스스로를 방탕에 내맡겨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v.19)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수치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shameless)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치의 감각을 잃고’라는 것은 ‘감각 없는 자’라는 헬라어 “아펠게코테스”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은 ‘마음이 굳어짐’이라는 의미로써 문자적으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적 의미는 ‘자신을 방탕에 내맡기고서도 아무런 수치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육욕에만 얽매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사도가 무엇을 고발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사도는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것입니다. 바로 부패한 죄의 지배를 받는 옛사람이 살아가는 불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자가 이런 옛본성에 지배 받을 수 있음을 사도는 강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범죄심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 남자를 그리고 그 여자를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스스로 결정한 선택’ (choices of his or her own decision) 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생각의 진행과정’인 것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표현과 같이 ‘이러한 반복되는 선택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품을 낳고, 성품은 운명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고발한 죄로 말미암은 허망한 인간의 마음이요,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짐으로 수치심을 잃게 된 타락한 마음, 곧 옛사람이 지배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저는 ‘존 맥아더’목사가 본문의 ‘옛사람의 삶의 방식’을 설명하면서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1978년도에 행했던 설교에서 그가 인용했던 충격적인 자료를 잠시 여러분에게 소개할까 합니다. 이 글은 미국의 유력한 비즈니스 잡지인 ‘포브스’ (Forbes)에 “The X-rated Economy” (by James Cook), 번역하면 “외설물 산업”이라는 타이틀로 실린 기사입니다. 존 맥아더목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기사인데, 그것은 ‘포노그래피’ (=외설물)는 더 이상 불법 비지니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포노그래피 시장은 단순히 변태성욕자나 정서장애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중상층 시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상당히 충격적인 데이터를 소개 하는데, 그것은 ‘캘리포니어 주 법무부’의 <보고자료>에 따르면 미국내에서의 포노그래피 업주들이 한해동안 $ 4 billion (40억달러)를 능가하는 매출액을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화산업과 음악산업을 모두 합친 것을 능가하는 규모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노그래피’ 바로 외설물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현재 2022년의 미국 포로노 시장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1978년도,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44년전의 미국에서의 외설물의 시장 잠식현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 4billion (40억달러)을 원화로 계산해 봤더니, 대략 4조 8700억원이었고, 그 당시 한국 정부의 일년예산 3조 5000여억원에 비해서도 1조 이상 더 많은 돈이 미국의 외설물의 시장에서 거래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미국만의 문제일까요? 일본이나 스웨덴, 노르웨이, 캐나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 아니 전세계 어느 나라도 여기에서 자유로운 나라가 있을까요? 그리고 제가 정말 문제제기 하는 것은 세상의 불신자들이 아니라, 우리 크리스챤은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크리스챤들이 육체적 유혹과 쾌락의 죄악된 성향에 이끌려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적 타락의 이러한 단면은 인간이 저지르는 악의 문제에 있어서는 또한 한부분에 해당합니다. 이런 성적 타락 뿐 아니라,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추구함으로 믿음의 순수성과 양심을 저버린 수없이 많은 부패한 본성의 지배당하는 삶을 우리 크리스챤들 또한 살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옛사람’을 벗어나지 못하는 크리스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크리스챤이 ‘부패한 죄의 본성에 지배되어 살아가는 옛사람에 속한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사도가 도전하는 점인 것입니다.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인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죄로 인한 부패한 본성에 의해 지배받는 옛사람의 속성들, 곧 예수 믿기 전의 죄악된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요, 부르심에 합당하게 성령의 열매로 하나됨으로 자라나는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떻게 옛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이 이어지는 <23~24절>입니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입음으로써’ 옛사람을 벗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과거의 거짓된 생활 방식에 속한 옛사람을 날마다 더 벗어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