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31, 2019

“용서 하셨나요?” (Did you forgive your brother?)

Preacher:
Series: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6:12
Service Type:

“용서하셨나요?”

(Did you forgive your neighbors?)

3-31-19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12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설교 요약]

저는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우리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용서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 함께 살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너희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신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v.12) 라고 가르쳐 주셨음에 주의해야 할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면서도 이렇게 용서가 힘든것일까요? 저는 그 중심에는 용서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있음을 봅니다. 무엇이 용서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일까요?” (What are our misunderstandings about ‘forgiveness’?)

첫째, ‘형제에 대한 오해’ 입니다 (Due to our misunderstanding about ‘our brothers’): 용서에 있어서 생각해볼때, 나에게 상처준 형제도 어쩌면 먼저 상처받은 자요, 희생자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첫걸음이라 저는 믿습니다. 내가 오해하는 것은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이 ‘그가 저지른 행위를 단순히 잊어 버림’으로 여긴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더 나아가 내가 믿는 선하신 하나님께 그를 내어 맡긴다는 뜻 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데로 말입니다. “ ~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 하시니라” (롬. 12:19)

둘째, ‘나 자신에 대한 오해’ 입니다 (Due to our misunderstanding about ‘ourselves’):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쓴뿌리’ (bitter root) 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5) 경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용서는 ‘내가 마음이 좋아서 형제를 봐준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그것을 넘어서서 <내 속에 형성된 그 쓴뿌리를 제거하는 적극적인 작업>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깨닫아야하는 것 입니다.

셋째, ‘하나님에 대한 오해’ 입니다 (Due to our misunderstanding about ‘God’):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은 내 행위데로 내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생각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도전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때 또한 형제를 사랑할수밖에 없다는 것이요,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게 된다는 것 (요일. 4:20) 입니다. 따라서, ‘네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어떻게 너의 그 큰 죄용서함 받고도 형제의 작은 죄를 용서치 않을수 있느냐?’고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강하게 도전하시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은 만큼,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를 누린만큼 더욱 형제의 허물을 용서함으로 과거의 상처로 인한 쓴뿌리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감사와 은혜의 삶을 누리는 복된 삶 사시기를 기대 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여러분은 용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용서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성 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보다 더 깊은 영적 문제의 것임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점점 더 이해할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우리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용서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 함께 살펴 보기 원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6장>의 본문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데로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 (마. 6:5~13)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크게 살펴 본다면, <마. 5~7장>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산상수훈> (The Sermon on the Mountain) 이라고 불리는 그분의 탁월한 가르침 가운데 기록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것인지를 간결하면서도 심오하게 이렇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기도에 가르쳐주시기 전에 먼저 <마. 6:1~8>에서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외식하지 말라’ 고 경고 하십니다. 그 외식에는 첫째, 외식된 구제 (v.1~4), 둘째, 외식된 기도 (v.5~8)가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외식’ (hypocrisy)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암적 존재임을 주님은 경고하고 있는 것 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찬양과 경배’로 시작되어야 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9) 라고. 그리고 이어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이 이루어질것’을 구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0)라고.

그리고 나서 주님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구해야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11),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12),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함’ 받기를 (13 a). 그리고 나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구하며 기도를 마무리하라고 (13b)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그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전체내용 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리 길지않은 기도 가운데 ‘용서에 대한 간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래 놀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필요만큼이나 우리는 날마다 실수와 허물로 인하여 죄를 범하기 때문일것 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죄용서함 받지 않고는 살아갈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저는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너희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신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v.12) 라고 가르쳐 주셨음에 주의하기 원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우리의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의 죄와 허물을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점을 주님은 매우 분명히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v.14,15)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 용서의 대해 생각해 볼점은 이것 입니다. 솔직히 용서의 문제는 그것이 아무리 심각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이라 할찌라도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 입니다. 왜 우리는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면서도 이렇게 용서가 힘든것일까요? 저는 그 중심에는 용서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있음을 봅니다. 이제 무엇이 용서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일까요?” (What are our misunderstandings about ‘forgiveness’?) 라는 질문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용서의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결함을 받을수 있기 원합니다.

첫째, ‘형제에 대한 오해’ 입니다 (Due to our misunderstanding about ‘our brothers’): 물론 어떤 형제로 인하여 내가 받은 고통과 상처가 심하면 심할수록 이 용서의 문제는 결코 쉽지 않을것 임을 우리는 어렵지않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도전하신것과 같이 우리 각자가 그 상처준 형제를 용서해야만 한다면 그 첫걸음은 어디서부터 가능할까요? 솔직히 우리는 첫걸음에 원수를 사랑할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상처준 형제도 어쩌면 먼저 상처받은 자요, 희생자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첫걸음이라 저는 믿습니다. 폭력적인 가정환경에서 폭력적인 인물이 자라나고, 비인격적인 부모 아래서 자란 사람이 또한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형성되어 간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닌것 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은 이것을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 사실 입니다.그러나 그 형제도 또 한사람의 희생자임을 우리가 이해해 나갈때, 여러분이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오해하는 것은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이 ‘그가 저지른 행위를 단순히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닐것 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측에서 그것을 없는 것으로 덮어주는 것이나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믿는 선하신 하나님께 그들을 내어 드린다는 뜻 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그를 맡김을 뜻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 성도에게 이렇게 권고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 하시니라” (롬. 12:19) 고. 내가 잊어버리고 없던것으로 덮어두는 것이 용서가 아니라, 그 형제를 하나님의 선하신 손에 맡기고 요셉과 같이 그 형들을 회개에 자리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나 자신에 대한 오해’ 입니다 (Due to our misunderstanding about ‘ourselves’):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쓴뿌리’ (bitter root) 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5) 경고 합니다. 여기서 심각한 것은 ‘쓴뿌리’가 내속에서 자라날때 그것으로인해 내 자신이 심한 괴로움과 고통에 시달릴뿐 아니라 영적으로 더러움을 입게 된다고 경고한다는 사실 입니다. 용서가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를 넘어서서, 영적인 강력한 영향을 준다고 하나님은 히브리서 기자의 입을 빌어 경고하시는 것 입니다. 내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할때, 내 속에서 쓴뿌리가 나와서 계속 나를 괴롭히고 내 영적 상태를 심히 황폐화시키고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용서는 ‘내가 마음이 좋아서 형제를 봐준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그것을 넘어서서 ‘내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할때 내가 계속해서 당하게 될 육체적 그리고 영적 폐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용서란 <내 속에 형성된 그 쓴뿌리를 제거하는 적극적인 작업>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깨닫아야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두번째 오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것은 ‘나 자신도 남에게 고통과 상처를 줄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입니다. 이것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안타깝게도 사실 입니다. 우리가 형제에 대한 용서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드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할때 그것이 쓴뿌리가 되는 영적 원리는 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내가 형제에 대해 저지른 실수와 허물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영적 진리인 것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여러분과 저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기 때문 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고 사도바울이 선언하는 이유가 그것 입니다. 이것은 ‘도덕폐지론’ (antinomianism)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져 주시는 생명과 은혜의 역사요, 죄사하심과 회복의 역사를 선언하는 것 입니다. 날마다 나의 죄와 허물을 숨김없이 주께 고백함으로 죄용서함 받고, 깨끗한 영적 상태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입니다. 더이상 과거의 실수와 허물이 내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않되기 때문 입니다.

셋째, ‘하나님에 대한 오해’ 입니다 (Due to our misunderstanding about ‘God’):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밝혀주신 용서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했다고 하면서도 우리 크리스챤들 중에는 이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이 사실 입니다. 그것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v.15) 고 주님이 밝혔으니, 우리는 형제들에게 용서를 행한만큼 하나님께 용서함 받을수 있다. 따라서 내가 형제의 죄를 모두 용서하지 않았다면, 내 죄도 결코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함 받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말 입니다. 과연 그렇까요? 결코 그렇치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내 행위데로 용서함 받은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중 그 누구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는 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은 내 행위데로 내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생각하는 것 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나는 이미 어떤한 죄와 사망으로 부터도 해방된 것 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영원토록 자유케 된 것 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도전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씀의 하나가 사도요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 4:20) 고. 요한의 결론은 “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요일 4:21) 는 것 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을 소유하게 된 영적 신분을 이해한다면, 이것이 내 행위로 된것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아는 것 입니다. 행위로 불가능한 죄용서함과 구원받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은혜를 믿음으로 가능하게 된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의 영적 상태라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수 있느냐? 어떻게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수 있느냐’는 것이 사도요한의 도전인 것 입니다. 그 형제의 허물이 아무리 크다할찌라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 받은 내 죄의 허물보다 크겠느냐는 것 입니다. 주님은 오늘말씀에서 ‘네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희 죄를 용서치 않으실것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어떻게 그 큰 죄용서함 받고도 형제의 작은 죄를 용서치 않을수 있느냐’고 강하게 도전하시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뒤에 <마. 18:21~35> 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용서할줄 모르는 종’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동일한 도전인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한 형제의 허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결코 남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쉽게 판단할수는 없습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주제 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살펴본것과 같이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기를 매우 원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 큰 죄에서 용서해 주셨기 때문 입니다. 그로말미암아 우리 안에 형제를 사랑함으로 긍휼히 여길수 있는 용서의 힘을 주셨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내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때 그 쓴 뿌리는 나를 계속적으로 괴롭힐뿐 아니라 내 영적 상태를 파괴하고 영적 더러움으로 치닫게 하는 무서운 결과가 주어지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소유한 만큼,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를 누린만큼 더욱 형제의 허물을 용서함으로 과거의 상처와 쓴뿌리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 가운데 기쁨과 감사와 은혜의 삶을 누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의 삶 되시기를 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