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8, 2019

“이 마음을 품으라” (Let this mind be in you)

Preacher: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2:5
Service Type:

“이 마음을 품으라”

(Let this mind be in you)

12-8-19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ians) 2:5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Let this mind be in you,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설교 요약]

       사도는 오늘 본문말씀에서“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Let this mind be in you) 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못할 때 서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까?” (What is the mind in Christ Jesus?) 그것은,

      첫째, ‘겸손의 마음’입니다 (It is the mind of humility in Him): 사도 바울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빌. 2:7~8a) 예수 그리스도는 도리어 자신의 모든 하늘의 특권을 포기하시고 종의 모습으로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순종의 마음’입니다 (It is the mind of obedience in Him): 주님은 겸손하실 뿐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기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v.8b)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십니다.

      셋째, ‘사랑의 마음’입니다 (It is the mind of love in Him):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 ~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4,9)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사랑의 마음인 것입니다 (요.10:11).

성도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셔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세상을 이기고, 날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이 평소에 늘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삶의 롤모델로 삼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 입니까? 솔직히 제 개인적으로 늘 기도하는 제목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게 해주십시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제목과 현재 저의 상태는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를 돌아볼 때 저는 때로 실망이 되기도 하고,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기를 소망하는 것은 저 혼자만의 기도제목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함께 예배 드리는 성도 여러분의 소망이자 기도제목임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주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선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따라 날마다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먼저 한가지 도전하기 원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들은 예외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닮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정작 무엇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막연히 주님을 따르고 배워야 한다고 원론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좀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주님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결단이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부족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 뿐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크리스챤에게 도전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이 마음을 품으라” (v.5a)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도전이자 명령입니다. 막연하거나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도전이자 영적 아비로서의 권위있는 명령인 것입니다.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그분의 마음을 본받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사도가 이런 도전의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오늘의 본문을 옳바로 이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빌.2:1~4> 말씀입니다. 사도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하는 것이 <v.1~4>의 요지입니다. 그리고 그중 에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을 가장 집중적으로 강조하는 말씀이 <v.2> 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Fulfil you my joy, that you be like minded, having the same love, being of one accord, of one mind) (v.2)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런 사도 바울의 권고는 어떤 새로운 것이라기 보다는 이미 우리 주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명하신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는 말씀의 연장선상 위에 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런 주님의 중심명령이자 가장 우선적인 <사랑의 명령>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시한번 강조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우리 성도가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위해서 성도들이 서로 격려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고 있는지? 성령으로 교제하고 있는지? 그리고 서로 친절과 동정을 베풀고 있는지?’(v.1)를 사도는 먼저 질문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너희는 이미 서로 사랑할 준비가 됐다’는 것입니다. 이제‘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v.2)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이러한 가상질문에 대해서 사도가 이번에는 <부정적 개념>으로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를 설명한 것이 <v.3~4>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유익도 돌아보라” (v.3~4)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육신에 속한 자아를 죽이는 것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툼과 허영을 추구하는 본성, 즉 내 이익만을 추구하는 육신적인 본성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목 박는 (=죽이는)것입니다. 이를 통해 서로 사랑함을 배워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우리 성도가 서로 사랑 할수 있는 길을 소상하게 설명한 사도는 오늘 본문말씀, <빌.2:5>에서 불연듯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Let this mind be in you) 고 선언합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고, 사도가 가르쳐준 사랑하는 방법을 따라 노력한다 할찌라도 ‘이 마음’을 품지 못할 때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절함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힘쓸 찌라도 결과는 도리어 서운함과 미워함과 서로 당 짓고 원수 맺는 쓴 뿌리만을 맺을 뿐임을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까?” (What is the mind in Christ Jesus?) 그것은,

      첫째, ‘겸손의 마음’입니다 (It is the mind of humility in Him):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요.11:28~29)라고. 우리 성도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될 때, 우리 마음이 쉼을 얻게 될 것임을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참된 평화와 안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겸손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성육신’ (Incarnation)사건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v.6~8a)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등하신 <성삼위 하나님>, 즉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자신의 모든 하늘의 특권을 포기하시고 종의 모습으로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성육신 사건’은 그분의 겸손을 보여주는 클라이막스라고 사도바울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자신이 가진 영광스런 특권을 버리고 지극히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고 사도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둘째, ‘순종의 마음’입니다 (It is the mind of obedience in Him): 구약에서 장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예언했던 대표적인 이사야 선지자는 600여년 후에 오실 메시야를 이렇게 눈 앞에서 보듯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사.53:3,7) 라고. 왜 메시야 그리스도는 이런 멸시와 천대, 곤욕과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하게 비참한 십자가를 지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의 절정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성육신사건/ Incarnation)이라면,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뜻에‘순종한 마음’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사도 바울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기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v.8b)라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살면서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길 열망했고, 그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비록 완전한 하나님일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었기에 그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벗어나고 싶고 거부하고 싶은 모든 인간적인 갈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이렇게 순종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22:42)라고. 그럼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그 십자가의 죽음을 심히 기뻐하시고 그를 통해 영광 받으셨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예정하신 그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성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v.9~10)라고 사도는 그분의 순종의 가치를 찬양합니다. 바로 이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주님의 순종의 마음을 날마다 품어 나가고 있습니까?

      셋째, ‘사랑의 마음’입니다 (It is the mind of love in Him):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순종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것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그런 부득이 함의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이요,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심을 통해 그 깊은 신뢰와 사랑 가운데서 비롯된 인격적 결단의 순종임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4)라고 우리 주님은 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자 굳게 결심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친구 삼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감동적인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시 되 중도에 그만두는 사랑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인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빌.2:1~4>말씀을 통해 사도가 ‘서로 사랑하라’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하다가, 왜 갑자기 “이 마음을 품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v.5)라고 도전하는 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랑을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요, 우리가 아무리 완벽하게 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정의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다 손 치더라도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 사랑을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15:4)고 약속하시고 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9~10)라고. 여기서 주께서 밝혀 보여주시는 영적 원리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뜻이요, ‘주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주의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주님의 사랑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통해서 일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내 죄가 완전히 씻겨졌고, 그분의 생명으로 내가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함으로 그의 통치 안으로 들어 감’으로서 가능한 것 입니다. 성령의 충만하신 도우심과 능력으로 죄와 육신과 싸워 이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점점 더 우리 주님의 아름답고 장성한 모습으로 우리는 자라나고 서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오늘 사도 바울의 도전은 성도 여러분과 저를 향한 단순한 도전일 뿐 아니라, 어떻게 바울 자신이 그토록 세상이 줄수도 빼앗을수도 없는 넘치는 기쁨의 삶을 살수 있었는지에 대한 놀라운 고백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바로 복음을 통해 넘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사도 바울의 삶의 비밀은‘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시 길 소원합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을 사로잡고 통치하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날마다 뜨겁게 서로 사랑 함으로서 감사와 기쁨과 만족의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