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8, 2019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To die is to gain)

Preacher: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1:20~21
Service Type: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To die is to gain)

12-1-19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pians) 1:20~21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이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노니 (I eagerly expect and hope that I will in no way be ashamed, but will have sufficient courage so that now as always Christ will be exalted in my body, whether by life or by death)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설교 요약]

       우리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3)라고. 바로 그런 사람이 사도 바울임을 오늘 본문은 잘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v.21) 라는 것입니다. <존 파이프목사>는 죽음이 유익한 다섯가지 이유’ (Five reasons death is gain)라는 그의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죽음이 유익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영이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Our spirits will be made perfect):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죄가 없을 것이며, 우리의 내적 전쟁은 끝이 나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 입니다 (We will be relieved of the pain of this world): 죽자마자 몸이 부활하는 기쁨을 얻게 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갈 때 피할수 없는 그 수많은 고통에서 자유하게 될것 입니다.

셋째, ‘영혼의 심오한 안식을 얻게 되기 때문’ 입니다 (We will be given profound rest in our souls): (계.6:9-11) 우리는 이 땅에서 누릴수 있는 그 어떤 경험과도 비교 할수 없는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은 보살핌 아래서 누리는 평화와 행복을 죽음 이후에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진정한 본향에 온 것을 경험하기 때문’ 입니다 (We will experience a deep at-homeness): 우리가 본향인 하나님의 집에 돌아가서 그리스도를 다시 볼 때 말로 다할수 없는 안정감과 평화 그리고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 입니다 (We will be with Christ): 파이퍼목사는 묘사하기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우시고 강하고 친절하시기에, 그를 찾는 자의 필요를 아십니다 ~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가 어떻게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잘 이해할수 있도록 그 무한한 은혜와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분인 것입니다’라고 잘 설명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왜 그토록 소망스러운지 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에 대한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v.21)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소중한 고백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섬기고 복음과 함께 고난도 받음으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성령충만한 삶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 합니다.

 

[설교 전문]

       세상에서 제일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 있는데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사람입니다. 죽임을 겁내지 않고 덤비는 자가 가장 감당하기 힘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잘못된 동기로 인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내놓고서 겁없이 덤벼들 때 조차도 감당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면, 진실로 가치 있는 일에 목숨을 내놓고 맞서 싸운다면 그는 진정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3)라고. 바로 그런 사람이 사도 바울임을 오늘 본문은 잘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요, 그럼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도 유익한 삶이다’고 고백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귀한 고백을 할수 있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원합니다.

저희들은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이 자신이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빌.1:12절>의 고백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과연 바울이 당한 일이 어떻게 좌절과 실패가 아니라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그리고 믿음의 승리와 참된 기쁨을 가져 올수 있었는지를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요약?!) 그럼으로 이어지는 <15~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심지어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동역자들의 잘못된 동기로 인한 복음의 열심조차도 기뻐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동기와 형편으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 입니다.

사실 바울만큼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 더 없을 정도였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의 삶의 시작은 언제나 ‘In Christ’에서 였고, 그의 삶의 목표는 ‘For Christ’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욕을 먹고, 오해받고 고통을 당하는 한이 있다 할찌라도, 만약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의 복음이 흥왕 할수만 있다면 그는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5~18절>말씀의 요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삶의 태도와 진정한 바램이 무엇인지를 가장 선명하게 펼쳐 보여주는 고백이 오늘 본문 말씀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의 크라이막스라고 저는 부르고 싶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v.21)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존 파이퍼목사>는 ‘왜 사도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영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존 파이프목사>는 죽음이 유익한 다섯가지 이유’ (Five reasons death is gain)라는 그의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그 죽음이 유익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영이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Our spirits will be made perfect):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죄가 없을 것이며, 우리의 내적 전쟁은 끝이 나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죄가 함께 거하는 썩어질 육신의 장막을 벗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놀라운 영적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 입니다 (We will be relieved of the pain of this world): 죽자마자 몸이 부활하는 기쁨을 얻게 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갈 때 피할수 없는 그 수많은 고통에서 자유하게 될것 입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이야기를 통해 그 놀라운 반전이 죽음 이후에 기다리고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부자가]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6:25)

셋째, ‘영혼의 심오한 안식을 얻게 되기 때문’ 입니다 (We will be given profound rest in our souls): (계.6:9-11) 우리는 이 땅에서 어느 여름날 밤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누리는 평화롭고 행복한 순간과는 비교할수 없는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은 보살핌 아래서 누리는 평화와 행복을 죽음 이후에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진정한 본향에 온 것을 경험하기 때문’ 입니다 (We will experience a deep at-homeness): 우리 모든 인간은 비록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할찌라도, 하나님 없이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떠나온 본향을 그리워하듯 하나님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단지 불신자들은 그것이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본향인 하나님의 집에 돌아가서 그리스도를 다시 볼 때, 우리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안정감과 평화 그리고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집에 거하게 될 것을 이렇게 설램과 소망 가운데 확신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 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23:6)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 입니다 (We will be with Christ):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우시고 강하고 친절하시기에, 그를 찾는 자의 필요를 아시고, 그들을 매순간 진정한 기쁨과 만족으로 이끄시도록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사랑이 넘치시고 자신이 사랑하는 자가 어떻게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잘 이해할수 있도록 그 무한한 은혜와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분인 것입니다’라고 존파이퍼 목사는 설명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왜 그토록 소망스러운지 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 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빌.1:21~23) 라고 말입니다.

그가 사나 죽으나 그 속에서 살아 계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니, 주님과의 하나된 이런 관계를 이 세상이나 저 하늘의 천사조차도 끊을수 없는 것 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과연 무엇인지를 <v.24~26>에서 매우 솔직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그가 지금 당장이라도 육체의 장막을 떠나 주님과 만나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조금도 거짓없는 사도의 바램이었음을 믿습니다.

위에서 ‘죽음이 유익한 5가지 이유’에서 살펴본데로, 사도바울은 진실로 육체의 장막을 벗고 주님과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결론은 ‘가능한데로 더 살기를 원한다’(v.24)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v.24) 고.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왜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일까요? 그의 개인적인 바램은 지금 당장이라도 육체의 장막을 벗고 주님과 연합하는 것인데, 왜 가능한데로 더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사랑하는 양무리인 교회를, 주님의 몸된 교회 성도들을 위함 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질문하기 원하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동기는 무엇입니까?’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불신자들처럼 육신의 향락과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는 것이 그 살고자 하는 이유 입니까? 아니면 죽음이 그냥 두려워서 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의 양무리를 섬기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삶의 동기가 있습니까? 이런 사도 바울의 마음이 진정으로 성숙된 크리스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자세와 가치관임을 우리는 똑똑히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도 바울로 만든 내적 힘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제 사도는 성도의 유익을 위해 육신 가운데 거하기를 결심할 뿐 아니라, 빌립보성도들 아니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챤들에게도 이렇게 <1장>을 마무리하면서 격려하고 도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것은 첫째,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는 것입니다 (v.27~28). 이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믿고, 그 약속을 의지하며 그 가르침에 순종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서로서로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해 협력하고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을 위해 고난도 받아라’ (Suffer yourselves for His gospel also)는 것입니다 (v.29~30). 왜 우리 성도들은 고난도 받아야 할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그의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매우 큰 유익이요 영예라고 주님 자신이 약속하시고 또한 수많은 성도들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5:11,12)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죽음에 대한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v.21)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소중한 고백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런 고백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좀더 건강하게 좀더 열심을 다해 살고자 하는 이유’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자 함이 될수 있기를 기대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섬기고 복음과 함께 고난도 받고자 함이 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도바울 한사람 뿐만 아니라, 내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성령충만한 삶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