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4, 2017

“임마누엘” (Immanuel)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1:21~23
Service Type:

“임마누엘”

(Immanuel)

12-24-17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1:21~23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you are to give him the name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All this took place to fulfill what the Lord had said through the prophet:)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they will call him Immanuel” – which means, “God with us.”)

<서 론>

만약 여러분이 나사렛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의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나를 살리신 구원자 이심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진실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 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가족들의 소중함을 알고 사랑 하지만, 어떻게 나의 마음을 그들에게 나타내며 어떻게 나의 사랑을 전할지 몰라서 모덤덤하게 지내는 청소년처럼’ 그렇게 또 한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자 하지는 않습니까?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v. 23) 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고 영원토록 그분 안에서 생명과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원 합니다.

<본 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6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 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메세지를 준비 하면서 나를 위해 독생하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 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내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감사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하나님의 율법을 먼저 받았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이스라엘민족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소위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 (히브리어) 혹은 ‘그리스도’ (그리스어) (‘기름부은 받은 자’ 라는 뜻임) 로 받아 들이지 않는 것 입니다. 왜 그럴것인가? 하는 많은 궁금함으로 여러번 관련 자료도 찾아 본적이 있습니다.거기에는 이런 저런 이유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1) 유대인들은 ‘정치적 메시야’ 를 원했다는 것 입니다; 마치 그들이 언제나 자랑하는 다윗왕과 같이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으로 이스라엘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킬 정치적 메시야를 원했다는 것 입니다. 2) 그들은 또한 ‘인간적인 메시야’ 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나사렛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 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의 몸을 고쳐 주실뿐 아니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선포 했을때, 이들은 ‘감히 저가 사람인 주제에 하나님만 주시는 죄사함의 권세를 선포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의심했던 것 입니다. 그리고 3)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강한 배척’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특별히 가장 유대교에 영향력이 컸던 바리새인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유는 그당시 <정치 & 종교 합일체제> 사회에서 이들이 가졌던 기득권에 대한 예수님의 신랄한 비판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비판, 죄를 정죄, 성전 청소….) 과 그들의 메시야관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는 점을 들수 있습니다. 또한, 4)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그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더욱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오게 한 점을 들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알수 있드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독교를 처음으로 국교화한 후 기독교는 중세 천년의 로마교황중심의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유대인들에 대한 여러가지 박해가 행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탄압하는 기독교인들이 믿고 따르는 ‘나사렛 예수’ 도 그들은 기독교인들과 다름없는 자신들을 탄압하고 박해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불행한 역사가 아닐수 없는 것 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시야를 예언한 구약의 예언들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얼마나 잘못된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지에 대해서 저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이해와 선입관은 얼마나 무섭고 강한 것인가를 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무엇 보다도 유대인들의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한 영적 깨닫음이 없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게 닫혀 있었기 때문 입니다’.(요. 12:39,40; 사.6:9,10)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구원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 왔지만, 사도바울은 이런 동족 유대인의 완고하고 불신까지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이 구원의 불길이 이방민족에게로 번져 나가는 구원의 역사로 사용하셨음을 영의 감동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롬. 11장)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될때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것이라’ (롬. 11:25) 고 예언 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완악함으로 영적으로 어두어진 마음이 그들의 믿음 없음일뿐 아니라, 이것을 통해 모든 민족을 구원시키지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하신 사랑과 구원의 계획하심 이라는 것 입니다.따라서, 사도바울은 영의 충만 가운데 이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를 깨닫고 난 다음 북받혀 오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 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라고 말 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천사가 요셉에게 선언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고 말씀한 그 의미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God with us) 는 뜻인 것 입니다.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는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일뿐 아니라, 이사야는‘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평강의 하나님’(사. 9:6) 라고 선언 했습니다. 저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 이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과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What means ‘Jesus Christ with us’?) 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 어떤 떠들썩하게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돌아서서 주님을 잊어버리는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축하행사와 비교할수 없이 의미있고 중요하기 때문 일것 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생명을 통해 우리가 살게 된다’ (It means that we may live by the life of Jesus) 는 뜻 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우리 믿는자는 영생을 얻는다’ 는 교리 (teaching/ doctrine) 는 제 개인적인 견해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힘든 성경의 가르침’ 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는 가르침을 언제나 말씀하고 있다고 저는 지난주에도 강조한바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제가 의롭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다면, 이 믿음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 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만큼 쉬운듯 하면서도 어려운 단어는 없다고 저는 생각 하는 것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그것은 ‘믿음’ (faith) 이 무엇인지를 내가 어떻게 이해 하는것 만큼 다양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는지? 를 이해 합니까? 그것을 설명할수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이것은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사실 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생명창조를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가 불가능 한것 처럼 말 입니다. 그러나, 내가 생명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나를 포함한 창조물의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 할수 없듯이, 내가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어진 사실을 부인할수는 없는 것 입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기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요, 그가 보내신 구원자로 믿을때 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 이라는 것 입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한지를 설명할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민수기 (민. 21:4~9) 에 나오는 ‘놋뱀사건’ 을 설명할수 있을 것 입니다. 즉, 하나님을 불신 함으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된자들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 ‘그것을 쳐다 보면 살것이다’ 라고 했을때, 그것을 봄으로서 낫게 된 사건’ 말 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어떻게 ‘놋으로 만든 뱀’ 을 한번 쳐다 봤다고 불뱀에 물려 치명적인 독으로 죽어가던 자가 살아날수 있습니까? 이것은 이해가 불가능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바로 ‘모세가 광야에서 높이 든 놋뱀’ 이라고 정의하신 것 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고. 이 불뱀사건이 정확하게 ‘십자가 위에서 자신이 이루실 승리’ 요, ‘장대위에 높이 달린 자신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가 받게 될 영생’ 임을 우리 주님은 선언하신 것 입니다. 어느 누구도 장대위의 놋뱀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때 어떻게 영생을 얻게 되는지를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 할수 없지만, 오직 그 믿음을 통해서 그 영생이 주어지게 됨을 우리는 이해하는 것 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의 부활하심과 함께 살아 났다’(롬. 6:3~7) 고 <로마서 6장>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의 부활하신 생명을 통해 함께 살아나게 되었다’고 말 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됨을 믿으십니까?

둘째,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신다 (It means that we may let the Holy Spirit live fulfilled in us) 는 뜻 입니다; 첫번째 ‘예수님의 생명으로 내가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다’ 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심’에 대한 가장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힘든 진리라면, 두번째 ‘약속의 영, 곧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 는 것은 우리 성도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저는 먼저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먼저 ‘예수 믿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 은 ‘내가 어떤 신분의 존재’ 가 되었는가를 뜻 합니다. 나는 이제 멸망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 입니다. 나의 신분이, 나의 존재가 바뀌었다는 뜻 입니다. ‘내가 그 사실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없이 말 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이제 내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삶을 산다’ 는 의미는 ‘내가 나의 신분이 어떠함을 점점 더 깨닫고, 깨닫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그분이 이끄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는 뜻 입니다.

제가 이해하기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거듭난 성도에게 원하시는 삶은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영적으로 출생하는 삶 뿐만 아니라, ‘이제 약속하신 성령을 신뢰하고 순종함을 통해 그분이 이끄시는 삶’ 을 살아가기를 진실로 원하심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철든 자녀’이기 때문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씩 깨닫은 만큼 인격적으로 반응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으로 자라나가는 자녀’의 삶이기 때문 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과 저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신 이유가, 그의 자녀로 삼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고 말 입니다. 무엇이 ‘선한 일’ 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분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까지도 신분에 걸맞게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그의 거룩하심을 쫓아 나를 깨끗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녀로 살아 가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녀의 삶’ 을, 철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갈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오직 약속하신 성령님의 이끄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고 바울은 우리를 격려 합니다. 성령을 좇지 않고는 우리 육체의 욕심을 이길수 없습니다. 성령의 통치를 받지 않고는‘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롬.7:17~23) 육신에 속한 자아를 이길수 없는 것 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이끄심과 충만하신 통치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삶’ 임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한 삶이 주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삶” (요. 7:37~39) 이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는 삶” (요. 4:14) 임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성령님을 신뢰하고 순종 하심으로 약속하신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까? 선한 일에 열심내는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까? 성령께서 주시는 생수의 흘러 넘치는 강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일년에 한번 크리스마스때, 혹은 가끔씩 생각날때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신다는 뜻이 아니라, <24hours & 7days> 언제나 내 삶의 중심에 나와 함께 거하시도록 살아가고 있다는 뜻 일것 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 입니다.

셋째,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된다 (It means that we may share the glory of Christ in the future) 는 뜻 입니다; 성도의 삶을 결정하는 모든 것은 어느 것 한가지도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 입니다. 제가 두번째,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삶’ 에서 나누고자 한점도 그것 입니다. 그뿐 아니라, 마지막 ‘세번째,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받게 될 영광’을 깨닫을수 있는 것도 사실 성령의 도우심 으로만 가능 합니다. 제가 <로마서 8장> 에서 몇번의 설교를 통해 성도 여러분과 살펴 본바가 그것 입니다. 그것은 무엇 입니까?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것 이니라” (롬. 8:17) 는 것이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도다” (롬. 8:18) 는 것 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주어질 우리 성도의 완성된 구원이요, 하나님의 상속자가 누릴 심히 영광의 삶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동일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삶’ 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 을 굳이 따로 떼어내서 설명하는 것 일까요? 그 이유는 이것이 현재가 아닌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요, 또한 이런 우리가 누릴 영광을 성령을 통해 확신하게 될때 만이 우리는 현재의 <고난> 을 이겨나갈수 있다고 믿기 때문 입니다.

사도바울뿐 아니라 신약의 모든 저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수 있는 점 중에 하나는 특별히 그들이 ‘성도들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고난’ 을 언급할때 마다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의 삶’ 을 강조 했다는 사실 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믿음장> 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 에서 히브리서기자는 어떻게 수 없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한명도 예외없이 겪었던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수 있었느냐? 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 대답은 무엇 입니까? 그들은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 (8) 을 바라 보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10)을 바라 보았다는 것 입니다. 바로 ‘본향/고향’ 을 바라보고 사모 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잠시 죄악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한” (24,25) 이유이고,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받은 고난 즉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을 맞기도 하고, 심지어 결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순교’ (36,37) 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승리할수 있었던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 입니다. 바로 ‘돌아갈 고향’을 바라 보았다는 것 입니다. 이 ‘고향’ 은 어딜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요, 그리스도께서 환난을 통과하고 이겨낸 성도들과 더불어 왕노릇하는 나라인 것 입니다. 바로 성경의 모든 믿음의 용사들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영광’ 을 바라보았기에 마침내 승리할수 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어떻게 주어질까요?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 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롬. 8:16) 에서 오는 확신인 것 입니다. 이 확신만이 현재의 겪는 모든 불같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를 건져주고, 죄와 사단의 공격에서 맞써 싸워 이기게 하는 것 입니다. 현재뿐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 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증거를 통해서 입니다. 여러분은 이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불의 시험 가운데서도 이겨나갈 ‘그 아들과 누릴 영광’ 을 바라보는 증거를 누리고 있습니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땅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가운데 단 한분이라도 아직까지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그를 믿음으로 ‘그의 생명으로 영생’ 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 했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자녀에 신분에 걸맞는 열매 맺는 삶’ 을 누려 나가길 기대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는 자녀의 증거를 받음으로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 을 바라보고 현재의 고난을 이겨 나가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사시길 소원 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사람과 이방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엡. 2:14) 고 선언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민족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담을 허무셨다는 것 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어떤 존재 입니까? 그분은 여러분과 그 어떤 인간관계 속에서 가로막힌 장벽을 허무시는 ‘평화의 왕’ (사. 9:6) 으로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살아 계십니까? 어떤 불같은 환난 가운데서도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과 은혜로 그것을 통과 시키심으로 세상이 줄수 없는 ‘평화와 안식’을 주시는 왕으로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살아 계십니까? 이번 크리스마스 하루뿐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토록 ‘내 삶의 중심에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 으로 그분과 함께 ‘평화와 만족과 샘솟듯 넘치는 기쁨’ 의 삶을 누려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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