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19, 2018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10:13~15
Service Type: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8-19-18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0:13~15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How, then, can they call on the one they have not believed in? And how can they believe in the one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can they hear without someone preaching to them?)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And how can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서 론>

저는 오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누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입니까? 그는 바로 ‘복된 소식’, 복음을 전하는 자 일것 입니다. 그 복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은 아름다운 것 입니다. 이제 가을학기가 시작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의 보배로운 피로서 우리를 구원케 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좋은 소식을 우리 각자가 먼저 더욱 깊이 깨닫고 풍성하게 누려나갈수 있기를 기대 합니다. 그로말미암아, 이제 더 이상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함으로 캠퍼스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원 합니다.

<본 론>

저는 몇주전 로마서 설교말씀에서 <롬. 9~11장>은 사도바울이 자기동족 이스라엘이 처한 운명과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구원의 계획 (=예정하심) 이라는 큰그림에서 영적으로 이해 할것인가?’ 라는 것이 <롬. 9~11장>의 주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동족 이스라엘이 처한 운명은 매우 안타깝게도 구원에서 제외 되었다는 것 입니다. 왜일까요? 바로 ‘나사렛 예수님’를 거부했기 때문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허락하신 죄사함 받는 구원의 은혜를 누릴수 없고, 그 구원에서 제외된 현실에 대해서 함께 나눈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안타까운 현실은 2000여년이 지난 오늘도 크게 달라진게 없다는 사실 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로마서 9~11장>까지 바울이 이 세장을 쓰게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우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로마서의 대주제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는 말씀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연결되느냐를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옳바르게 이해하는 관건이 될 것 입니다.

먼저, 이런 관점에서 살펴볼때 오늘 본문의 말씀뿐 아니라, <롬. 9~11장> 의 세장에서 왜 사도바울이 유달리 구약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본문의 동기가 사도바울의 동족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들이 왜 이런 구원에서 제외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들의 문제와 그 결과는 어떠한지?를 사도바울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수백년 혹은 수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택한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그분의 말씀으로서 밝히고 있는 것 입니다. 둘째 이유는, <이글을 읽는 유대인이나 유대인을 잘 아는 불신자들이 이 구약의 말씀을 통해 옳바른 깨우침을 받기 원했기 때문> 일 것 입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은 구약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믿는다고 주장하기 때문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약말씀에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바로 이해해야 한다’ 라고 사도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을 향해 설득하고 도전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셋째, <이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열어 놓으셨음을 그들이 깨닫기를 원했기 때문> 임을 사도바울은 밝히고 있는 것 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v.13) 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 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차별이 없다는 것 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를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것 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될때,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복음전도자의 발이 얼마나 아름답고, 그 삶이 얼마나 영광된 것인가?’를 이제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전도’를 뜨거운 감자처럼 좋고 훌륭하긴 하지만 내가 실천하기엔 너무 부담스럽고 힘든 의무로 여기진 않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더 이상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실로 복된 하나님의 구원의 좋은 소식임을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아멘’ 으로 고백하고 확신하기 때문일 것 입니다. 이 복음은 나의 자랑이요, 감사의 제목이 되기 때문일 것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선언하드시 ‘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은 축복되고 아름다운 것일까?’ 에 대해 살펴 보기 원합니다. 다시말하면, 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다울까요?” (Why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beautiful?); 그것은

첫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 (Because they are not ashamed of the gospel) 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는 말은 문자 그대로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다’ 는 소극적인 뜻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을뿐 아니라, 매우 자랑스럽게 영광스럽게 여긴다’ 는 뜻이 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이 말씀은 처음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 표현은 구약에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주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신다. ‘보라! 내가 시온에 한 돌을 놓아 기초를 삼았으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석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놀라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28:16/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한돌’은 무엇입니까? ‘귀하고 견고한 기초석’은 무엇 입니까?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말씀 입니다. 그는 우리 교회의 모퉁이 돌 (the corner stone) 되시며, 천국을 바치는 기초석 되시기 때문 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놀라 당황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선지자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800여년 전에 예언한 것 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이사야의 이 말씀을 <롬.9장> 마지막에 인용하면서 “ ~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롬. 9:33) 고 표현한 것 입니다.

제가 여기서 성도 여러분과 복음전도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에서 가장 먼저 우리 각자를 돌아보기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 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하는 것 입니다. 어느정도 신앙생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라면 ‘전도’에 대해서 ‘그것은 필요 없다’ 든지 ‘할만한 가치가 없다’ 라고 적어도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내가 비록 사도바울과 같은 그런 열정적인 전도자의 삶을 살지 못한다할찌라도 말 입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전도의 당위성에 대해 의심하거나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복음을 뜨겁게 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가 문제인 것 입니다. 만약 내가 그런 뜨거운 전도자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이 문제 일까요? 저는 그 중심에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함’이 있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복음을 아직까지 자랑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복음이 왜 그렇게 자랑스러운지를 깨닫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자랑스러워 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의 삶을 반드시 살게 될것 입니다. 복음전도는 결코 크리스챤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힘들고 부담스러운 의무사항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랑과 진리인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것을 깨닫고 자랑하고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께서 가도록 허락하셨기 때문” (Because the Lord let they go to preach)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유익함은 사도바울이 한두 마디로 서둘러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이 복되고 아름다운 것인가?’라고 우리가 질문했을때, 그 이유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을 자랑하기 때문이다라고 간단하게 결론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 합니까? 만약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인가? 라고 한걸음 더 나아가 질문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면, 사도바울은 그가 자주사용하는 변증법적인 방법을 통해 그의 논리를 전개해가고 있음을 봅니다. 특별히 오늘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만약 무엇 무엇이 없다면’ 이라는 <조건절/ conditional sentence> 을 사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의 결론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 하리요” (How can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v.15)라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말씀에서 분명하게 선포하고 고백하기 원하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그리고 사도바울 자신이 만약 보내심을 받지 못했다면 그 누구도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보내는 것 입니까?’ 그렇습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믿음을 통해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내신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조건절을 사용하여, 역설적인 문장을 사용하여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복음을 전파할수 없다’ 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 하십니까?여기서 사도바울은 다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 합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사. 52:7) 라고. 사도바울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니 ~” (고전. 15:10) 라고 고백한 것이 바울이 겸손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그 된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수 있다면, 우리 모든 성도의 삶 또한 동일한 것임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감당할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먼저 세우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불가능 했을것이라는 사실 입니다. 이것을 생각할때, 복음증거의 삶이 얼마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영광된 삶이요, 특권임을 점점 더 이해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복음증거자로 살아가도록 각자의 삶의 자리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이해합니까? 우리를 택하고 세우신 은혜를 깨닫고 누려 나가고 있습니까?

셋째,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 (Because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are saved) 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1차적으로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민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임을 지적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특별히 구약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적어도 구약의 말씀을 인정하고 믿기 때문 입니다. 이 구약의 말씀이 하나의 ‘교량’ (bridge) 역할을 해서 그들을 복음의 진리로 옳바르게 인도하고자 했던 것 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잘못 이해 했지만, 그 구약의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는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허락하신다’ 는 진리 입니다. 이런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약시대의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 2:32) 고. 사도바울은 요엘의 말씀을 그대로 오늘 본문 <13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 입니다. ‘누구든지 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 입니다. 요엘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 50:15; 스가랴 13:8,9; 스바냐 3:9~13; 마태 10:22…> 수없이 많은 말씀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있는 것’ 입니다. 단지 유대인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는 것 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누구도 차별이 없다는 것 입니다. 누구든지 공평하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대한 점’ 이요, ‘왜 사도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한 했는지?’하는 점 입니다.

저는 그동안 저의 짧지 않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전도’라는 단어만큼 우리 크리스챤들이 잘못 오해하고 삶속에 잘못 적용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 합니다. 전도에 있어서, 대표적인 두가지 잘못된 개념은 <극단적 칼빈주의> 와 <알미니안주의> 입니다. 먼저, <극단적 칼빈주의>는 복음전도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있으면, 하나님은 어떻게라도 택한자를 구원하실꺼야!’ 라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런자는 대부분 자신은 슬쩍 전도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에게는 복음전도는 여전히 부담이 되기 때문 입니다. 반대로,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은 나를 통하지 않으면 일하실수 없어’ 라고 하면서 지나치게 자신의 전도행위를 강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있어서는 전도에 대한 열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뭔가를 행하고 결과물을 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강하여 전도행위 자체를 곧 믿음과 구원의 척도로 두고자 한다는 것 입니다. 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다울까요?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어떤 의무감이나 강요가 아니라, 이 은혜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감사와 감격 가운데 자원함으로 아직까지 사망의 그늘에 있는 자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갈망 때문 입니다. 이 삶을 하나님께서 아름답다고 인정해 주시기 때문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전도가 여전히 부담 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 입니까?

<결 론>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선언 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이것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가 누릴 진정한 특권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바로 ‘자유함’ 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과 정확히 같은 것 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6) 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이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진정으로 여러분과 저에게 확인 시키고자 하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은 그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만큼, 그의 생명 안에서 자유케 된만큼 전할수 있다는 사실’ 이라고 믿습니다. 전도가 여전히 부담과 의무감으로 다가온다면 아직도 우리는 복음을 오해하고 있는 것 입니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오직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내가 그 아들의 생명으로 구원 받음에 대한 감사와 아들이 주시는 자유함 속에서 자원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열심’ 이라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남은 인생이 이런 복음전도자의 열심으로 이어지길 소원 합니다. 우리를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성령님의 은혜하심으로 더욱 깨닫아 나가시길 소원 합니다. 그로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자원함 속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