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2, 2022

“주께 하듯” (As To The Lord)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6:5~7
Service Type:

“주께 하듯”

(As To The Lord)

5-22-22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6:5~7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Slaves, obey your earthly masters with respect and fear, and with respect and fear, and with sincerity of heart, just as you would obey Christ.)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Obey them not only to win their favor when their eye is on you, but like slaves of Christ, doing the will of God from your heart.)

7 단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Serve wholeheartedly, as if you were serving the Lord, not men,)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사도가 성령충만 받은 크리스챤들에게 제시한 마지막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상전과 종>의 관계인 것입니다. 먼저 사도는 종들을 향해 말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v.5)라고.

그런데 여기서<종들> (servants)의 헬라어 원어는 [둘로스]인데, 그 의미는 <노예> (slave) 입니다. 그 당시 에베소 성도들 중 상당수가 노예신분의 성도였던 것입니다. 사도는 노예신분이었던 성도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에게 도전합니다. 그 이유는 그 주인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주인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 24:44-46)고. 그렇다면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입니까? 그는 주인이 맡긴 양식을 때를 따라 그의 집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자가 충성된 종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도전하는 착한 종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악하고 게으른 종’은 어떤 자일까요?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 ‘눈가림만 하고’ (v.6) ‘억지로 일하는’ (v.7) 자인 것입니다. 주인이 볼 때는 열심히 하는 척하다가, 보지 않으면 게으름을 피우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니라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도가 도전하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하는 것’임을 깨닫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주님의 눈을 피해 게으름을 피우거나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동일하게 상전 (=주인)된 성도들에게도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v.9)고 도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상전도 종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종과 상전’의 관계는 오늘날 ‘종업원과 주인’ ‘주인과 손님’ ‘시민과 정부’ ‘학생과 교수’등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남보다 신분이 낮아서가 아니라, 우리 주께서 보여주신 모범 (막. 10:44-45)을 따라 ‘이웃을 사랑으로 섬김’으로 주님의 지혜롭고 충성된 제자의 삶 사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크리스챤을 성경에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비유합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과 같이 그리고 부패한 세상에서 짠맛을 내는 소금과 같이 살아갈 것을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도전하시고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그분의 빛된 자녀로 삼으신 이유임을 생각해 볼 때, 단지 나 혼자 구원받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그리고 여러분을 통하여 ‘모든 자가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다시한번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럼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남으로 그분의 생명과 진리의 빛을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비추고 있는가? 하는 우리 크리스챤의 ‘자기점검’ (=영적 성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상전과 종’을 향한 도전은 우리 각자에게 스스로를 점검하고 영적으로 다짐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 단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사도의 도전과 격려를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입니까?

이제 우리는 사도가 성령충만 받은 크리스챤들에게 제시한 마지막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상전과 종>의 관계인 것입니다. 사도는 언제나 하는 식으로 먼저 순종해야 할 대상을 향해 영적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종들’입니다. 사도는 종들을 향해 말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v.5)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종들> (servants)의 헬라어 원어는 [둘로스]인데 이 원래 의미는 <노예> (slave)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1)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여기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때 <종>이 정확히 헬라어 ‘둘로스’로써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제가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 출신의 크리스챤들 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노예신분’이었던 성도들이 상당수 되었을 것으로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는 사실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에베소 교회 성도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의 멤버들이 노예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하게 깨닫게 되는 사실은 ‘인간은 자유와 은혜를 넘치게 누릴 때는 그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 자유가 빼앗기고 은혜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자유와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나라가 100여년 전에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36년간 식민지의 백성으로써 자유와 주권을 유린당함으로써 다시 독립을 쟁취하고자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역사를 우리는 잘 압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이렇듯 전쟁이나 어떤 불행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권과 자유가 빼앗기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 자유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상당수의 노예 신분이었던 에베소 성도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인간은 이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상태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고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와 비교할 수 없도록, 자유를 더욱 갈구하게 되고, 그러함으로 자유와 생명의 복음을 더 잘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일 것입니다. 인생이 목마르고 허기질수록 더욱 영적 자유와 풍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에베소 성도 가운데 노예신분이었던 성도의 상태였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사도가 종들, 즉 노예인 성도들에게 권고하는 가르침을 보겠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v.5) 사도는 먼저 성도들에게 어떻게 그들의 주인에게 크리스챤 종들로서 대할 것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서는 오늘 사도의 가르침이 수천년 전 고대사회에만 적용되는 원리로 치부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가 ‘종’ 즉 ‘노예신분’인 성도들에게 말하는 것임으로 오늘날과 같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종과 주인’ 혹은 ‘노예와 주인’으로 상징화 되어 있는 관계성 속에 오늘날도 동일하게 사회적으로 다양한 인간관계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종업원과 주인>으로 표현되는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입니다. 또한 직장에서의 <부하직원과 상사> 혹은 비지니스상의 <상인과 고객> 그리고 학교에서는 <학생과 지도교수>등의 관계에서 와 같이 모든 인간 사회 속에서 다양한 관계 속에서 오늘 말씀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모든 관계 속에서 지금 사도가 언급하는 <종과 주인>의 관계는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먼저 종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도전합니다. 여기서 사도가 “두려워하고 떨며 상전에게 순종하라”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혹시 그 주인들에게 잘못 보이거나, 그들이 화가 나면 어떤 무서운 징벌을 받을찌 모르기 때문일까요?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가 과거의 종이나 노예 뿐 아니라, 오늘날 직장생활 하든 사업 (비즈니스)을 하든 삶의 현장 가운데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도전하고 격려하는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육체의 상전에게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크리스챤의 진정한 주인되신 그리스도께 하듯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주인되신 그리스도 주께서 그와 같은 삶을 원하십니다. 충성되고 성실한 종과 같은 그의 제자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로 만이 아니라, 주님의 빛과 진리를 전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열쇠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주의 재림에 대한 시기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비유로 설명하셨는데,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 24:42-43)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주께서 오실지 알 수 없음으로, 영적으로 늘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 24:44-46)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과연 누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인지? 누가 주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을 종인지? 를 설명하십니다.

이것은 곧 주님의 제자들의 삶의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때를 따라 주께서 맡기신 양식을 나눠 주는 자가 그분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면 하는 척하고, 보이지 않으면 게으름을 피우고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며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하며 악한 종처럼 교활한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악한 종처럼 주인 눈치만 보고, 게으름과 술 취함에 빠져 있는 자들은 예상치 않은 시간에 주께서 오셔서 그들을 엄히 때리고 벌할 것이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마. 24:48-51).

저는 우리 주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 정확히 오늘 사도가 본문에서 에베소 교회에 속한 종들과 육신의 상전들에게 도전하는 메시지임을 믿습니다. 사도는 먼저 종들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v.5)고 격려할 뿐 아니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v.6-7)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영적 주의를 집중해서 살펴보면 볼수록 점점 더 뚜렷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이 궁극적으로 ‘성실한 마음과 단마음으로 섬기고 순종해야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크리스챤에게 궁극적인 섬김과 영광을 받아야 될 주가 되신다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현재 삶의 위치에서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육체의 상전, 직장의 상사, 비즈니스 주인 그리고 손님에게 동일한 단마음으로 섬겨야만 한다>고 사도는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제 자신도 과거 직장생활을 했던 경험을 돌이켜 볼 때, 우리가 이런 사회생활 하면서 인간적으로 받는 대표적인 유혹이 있는데 그것이 사도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음을 저는 보게 됩니다. 그 첫째는 ‘두려워하는 마음’ (fearful heart)입니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기쁘고 자원하는 적극적인 (=긍정적인)마음이라기 보다는, 윗사람에게 혼나지 않고 벌받지 않기 위해서 하는 소극적인 (=부정적인)마음일 때가 더욱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눈가림의 마음’ (eyeservice heart)하고자 하는 유혹인 것입니다. 윗사람이 보든지 안보든지 상관없이 충성되고 성실한 마음보다는, 윗사람이 볼 때는 하는 척 하다가 보지 않으면 농땡이 부리고 게을러 지고자 하는 인간의 악한 속성이 자신을 충동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억지로 하는 마음으로’ (unwilling heart) 섬기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달고 자원하는 ‘단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수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먹고 살자니 어쩔수 없어서 일하는 마음자세가 바로 단마음이 아닌 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일구어 오게 된 그 뿌리에는 기독교적인 정신이 깊이 깔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적 정신은 소위 ‘청교도정신’으로 대표되는 것인데, 그 중심에는 우리가 오늘 사도의 가르침에서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들의 삶에서 성실하고 근면하게 자신의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편기자가 다윗왕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시. 78:72)라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왕이 하나님을 자신의 선한 목자로 신뢰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양들을 성실한 마음과 능숙한 손으로 넉넉히 섬기고 먹였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청교도 신자들이 자신의 맡은 바 일을 남이 보든 보지 않든 관계없이, 청렴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탁월하게 감당해 나감으로써 서구사회가 자본주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튼튼한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지금 에베소 성도들에게 촉구하는 핵심일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육신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께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시며 엄중한 심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 25:21)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이 우리 성도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눈에 보이는 여러분의 지도교수, 여러분의 직장 상사, 혹은 오너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있습니까?!

물론 여러분이 예상하시듯이, 사도의 권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종들에게 요구했던 꼭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주인들에게 도전합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엡. 6:9) 종들에게 ‘두려워하고, 눈가림만 하며 마지못해 하는’ 그런 소극적인 삶을 벗어 버리길 도전했다면, 상전 (=주인)들에게는 ‘종들을 위협하고 무시하여 함부로 부리는’ 악한 행위를 그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왜냐하면, 크리스챤 종들과 동일하게 크리스챤 상전들의 주인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내가 종들을 위협주고 함부로 대한다면, 주인되신 예수께서 과연 어떻게 생각하실 것이며, 어떻게 판단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종의 위치에 있든 혹은 주인의 위치에 있든 성도의 관심은 언제나 주님께 집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 충성하고 성실을 행하는 것이요, 이렇게 될 때 이런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 그 지역사회를, 그 도시와 민족 전체를 주의 빛으로 밝히고, 진리의 소금으로 짠맛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여러분이 성실하고 단마음으로 섬겨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 섬김은 결코 우리가 남들보다 낮은 존재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4-45)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성령충만한 자는 남에게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섬기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우리 주님의 본을 좇는 삶이라고 오늘 말씀에서 도전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눈가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과 단마음으로 주께 하듯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말입니다. 이런 성령충만한 인간관계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