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5, 2020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I) (How Majestic is Your Name!)

Preacher:
Passage: 시편 (Psalms) 8:1~2
Service Type:
  1.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I)

(How Majestic is Your Name!)

7-5-20

본문말씀: 시편 (Psalms) 8:1~2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O Lord, our Lord, how majestic is your name in all the earth! You have set your glory above the heavens)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라 (From the lips of children and infants you have ordained praise because of your enemies, to silence the foe and the avenger.)

 

[설교 요약]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성경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신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2가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하게
  • 그의 택한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알아 나가라고 명령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상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신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가운데서 <무엇이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지식인가요?> (What are the crucial knowledge of God?) 그것은,

첫째,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나님’ (God who is everywhere)입니다: 야곱은 아무도 없는 벧엘 광야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6)라고. 이 말은 지식적으로 몰랐다는 말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비로소 깨닫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시는 하나님’ (God who keeps His promise)입니다: 하나님은 99세 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들을 사라를 통해 반드시 허락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셋째, ‘거룩하신 하나님’ (God who is holy)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레. 11:45)라고.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그분의 성품에 동참할 거룩한 삶을 명령하시고 또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남은 평생의 삶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떠 올릴 때 어떤 느낌이 드나요?! 사랑과 평화와 은혜의 하나님이 연상되나요? 아니면 무섭고 까다롭고 엄격한 하나님이 떠오르나요?!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떠올리건 상관없이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하시는 지혜와 권능의 창조주시요,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느냐는 것은 우리 인간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정도가 그 사람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존의 ‘조직신학’에 따른 이해라기 보다는 역으로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 확인해 나가고자 합니다. 즉 성경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신 하나님을 기초로 겸손하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을 깨닫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 세상 만물과 우리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2가지 사항>을 강조하고 도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앞서 말씀드린 데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우리가 조금만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의 머리로 완벽하게 이해되는 존재라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성급하게 이해하고 또한 그분을 모두 이해하겠다는 만용을 부릴 때 그 결과는 매우 위험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거짓 신’을 만드는 꼴이 될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 스스로 하나님을 이해했다고 여기는 그 무언가는 사실은 ‘가증스러운 우상’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을 신뢰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고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을 섬기지 말라” (출. 20:4~5)고 명하신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 마음데로 그분을 설정하고, 형상화하여 섬길 때 따르는 위험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하게 <둘째> ‘그의 택한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알아 나가라고 명령하심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데로 하나님을 나의 느낌이나 바램으로 상상하고 형상화하고 섬기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 하시고 가증이 여기는 우상숭배의 행위가 될 수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 점점 더 알아 나가기를 심히 기뻐하시고 더 나아가 명령하심’을 성경을 묵상하면 할수록 더 깨닫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심으로 (revealed) 적어도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아 나감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자신을 직접 드러내 보여주시고 우리가 그분을 인격적으로 깨닫고 신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상상이나 바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 보여주신 성경을 통해 그분을 믿는 온전한 믿음에 견고히 설수 있도록 알아 나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지식인가요?> (What are the crucial knowledge of God?)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나님’ (God who is everywhere)입니다: ‘어느 곳이나 계신다’는 말을 한문으로는 <‘편재’ (遍在)하시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편재’라는 말의 뜻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두루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인 ‘전지’ (全知)하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omniscience’로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디에나 다 계시다는 것>과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두가지 개념은 엄격하게 보면 동일한 뜻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전지’라는 개념이 어디에나 계신다는 ‘편재’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는 곳에나 계신는 하나님’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개념으로 대변하고자 하는데는 이것이 우리 인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다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돌 베개하고 잠을 잤는데 그 꿈에 사닥다리 위로 천사가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또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가 어디를 가든지 지켜 주시며 그가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이끄실 것을 약속하시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야곱이 고백한 첫 말은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6)라고.

여기 모인 성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어느 곳이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머리로, 성경 교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 여기에 한 분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한 분도 그런 사람은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이나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두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느 곳이나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보신다는 의식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 문만 나서면 마치 지금부터는 하나님이 나를 보지 못하는 것같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 어느 곳에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은밀한 곳이 되었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되었건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시는 하나님’ (God who keeps His promise)입니다: 이것도 첫째번과 마찬가지로 ‘무엇이나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 즉 ‘전능 (全能)하신 하나님’을 대변하는 표현입니다. ‘전능’은 영어로 ‘omnipotence’입니다. 제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심’으로 표현한데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중대한 그분의 ‘모든 것을 다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그 어떤 것보다도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심’으로 나타난다고 저는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의 1차적인 뜻은 창세기 1장에서 나오듯이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사건속에 본질적으로 들어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해와 달과 별과 모든 존재하는 모든 자연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창조의 능력이 곧 전능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 전능을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심’으로 잡은데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아니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고 그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성경에서는 ‘약속의 성취’를 그분의 전능하심의 핵심으로 저는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무엇이 성경의 기적 중 가장 큰 기적이라고 생각합니까? 100세된 남편과 경수가 이미 오래전에 끊긴 불임의 90세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아닐까요!? 바로 아브라함이 100세때 약속하신 데로 90세의 아내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창. 12~21장).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때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창. 17:1~2) 고.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라고 그에게 명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완전하다’는 것은 ‘완전무결하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노아’를 평가하면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 (perfect man)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9)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완전하다는 것은 결점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한 믿음으로 행했음을 뜻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99세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라고 강조하여 밝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성취하고 말 것이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의심할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약속을 믿으십니까?

셋째, ‘거룩하신 하나님’ (God who is holy)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거룩하시다’는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에서 <카도쉬>로서, “성별되다/ 구별되다” 라는 뜻 입니다. 그런데 ‘거룩’이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서는 약 850회 등장하고,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360회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구약 성경전체에서 볼 때 총 1,100번 이상 ‘거룩’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것으로 볼 때, 이 거룩이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성품일 뿐 아니라 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웃시야왕이 죽던 해, 이사야가 하나님의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던 해에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심을 그의 앞에서 나타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고 그를 보좌하는 스랍 천사들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3) 라고. 오늘 본문에서 시편기자가 노래하듯이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심히 아름답고,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펼치신 것)” (v. 1) 입니다.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신 영광을 다 충족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거룩에 있어서 여러분에게 오늘 마지막으로 도전하기 원하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 만이 거룩하실 뿐 아니라, 그를 믿는 그의 자녀들에게 거룩을 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오랜 종살이에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건져 내시고 이렇게 놀라운 명령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레. 11:45)라고. 무엇이 거룩인지에 대해서 오늘 이 시간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자신만 거룩하실 뿐 아니라 그의 자녀들에게도 거룩을 명하신다는 말씀은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행할 거룩이 하나님과 동일한 거룩이 될 수는 없을찌라도, 거룩하라 명하신 분이 친히 우리를 그 명하신 수준의 거룩으로 인도하심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 시간에 하나님의 마지막 네번째 속성, ‘사랑이신 하나님’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축복의 은혜가 무엇인지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제가 한가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불평과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추구하고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 4:6)라고 통탄하신 것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지 못할 때 필경 죄악과 패망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남으로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주께서 하락하신 은혜의 유업들을 풍성히 누려 나가는 성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