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4, 2021

“창세 전에 택하사” (Chose Us Before The Creation The World)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1:4~5
Service Type:

“창세 전에 택하사”

(Chose Us Before The Creation The World)

11-14-21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1:4~5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For He chose us in Him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to be holy and blameless in His sight. In love)

5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He predestined us to be adopted as His sons through Jesus Christ, in accordance with His pleasure and will--)

[설교 요약]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의 존재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성령의 놀라운 통찰과 계시하심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본격적인 그의 메시지를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송영’ (Doxology)으로 사직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v.3)라고. 그리고 그 찬양의 이유는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모든 신령한 복’ (all spiritual blessings)이 무엇인지가 오늘 본문을 포함한 <엡. 1:4~14>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 하나님의 뜻하심 (= ‘신령한 복’을 주시는 목적) (엡. 1:4~14)은
  •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하심’ (v.4~6): <선택하심> (election)
  • ‘아들 하나님의 실행하심’ (v.7~12):<구속하심> (redemption)
  • ‘성령님께서 구속의 열매를 적용하심’ (v.13~14): 성령을 통한 <유업을 주심> (inheritance)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그분의 선하신 뜻가운데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 존재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은 우리 존재의 시작임과 동시에 구원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택하셔서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 <4절>에서 사용된 ‘택하다’ (elect)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크게 3가지의미로 사용됨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신정통치적 선택’ (theocratic election)입니다 (신. 7:6)

둘째, ‘역할적인 선택’ (vocational election)입니다 (요. 15:16)

셋째, ‘구원의 선택’ (salvational election)입니다 (요. 6:44)

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의미는 바로 세번째 의미인 ‘구원의 선택’ (salvational election)임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 14:6).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신령한 복을 깨닫고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중요한 한가지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내 뿌리는 무엇인가?’하는 것이요, 이것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건전한 자기 ‘정체성’ (identity)과 ‘자존감’ (self-esteem)을 형성하는 토양을 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과연 여러분의 존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여러분을 낳은 그날이 여러분의 시작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의 존재는 어떻게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성령의 놀라운 통찰과 계시하심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 존재의 시작은 동시에 내 구원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음을 사도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나의 올바른 정체성’ 그리고 ‘나의 참된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기쁨 가운데 누려 나가시길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v.1)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뜻으로”가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근본적이요 강력한 것인지를 지난 시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다메섹 언덕 위에서 만나 주시지 않았다면, 바울의 회심은 인간적으로 볼 때 상상하기 힘들다고 우리는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하심’은 바울 한사람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 즉 “그리스도 안에 신실한 자들” (v.1)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은혜인 것입니다.

사도는 본격적인 그의 메시지를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송영’ (Doxology)으로 사직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v.3)라고 <3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송을 받으셔야 하는지 하는 이유를 그는 설명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all spiritual blessings)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밝히는 ‘신령한 복’ (=영적 복)이 우리가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보게 될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 즉 그의 자녀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온갖 은혜요, 하늘에 속한 유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포함한 <엡. 1:4~6>에서 무엇이 ‘신령한 복’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 (v.4)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신령한 복’의 최종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의 정신’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율법의 정신입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거룩한 자녀로 세우는 것’입니다. 율법이 명하는 것은 우리를 모든 죄에 속한 부정을 벗어나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정결한 삶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담의 죄를 유전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행해나갈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이미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죄를 깨닫게 (함)” (롬. 3:20)인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곧 ‘죄를 깨닫게 함’입니다. 우리가 마음은 원이로되,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곤고한 존재가 우리 인간임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악된 존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으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의 능력을 따라 주어지는 ‘그분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할 때, ‘신령한 복’이 얼마나 우리 인간에게서 햇빛과 공기와 물과 같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요, 사랑인지를 더욱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령한 복’일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v.5)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것이 ‘신령한 복’임을 깨닫고 그것에 감격합니까? 아니면 ‘당연한 복’ ‘별 것 아닌 복’ 쯤으로 이해합니까? 저는 이 지점에서 우리 각자는 솔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이요 영광입니다’라고 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예수 믿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아닌가?!’ ‘그것이 뭐 그리 새로운 진리인가?!’ ‘뭐 그리 큰 축복인가?!’라고 질문하는 이상 여러분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사도가 강조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령한 복’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어지는 말씀 <엡. 1:4~14>을 통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신령한 복’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하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것은 <3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첫째는 <4~6절>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요, 둘째는 <7~12절>로서 ‘아들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마지막으로 <13~14절>로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시작임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의 하나가 오늘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바울은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의 시작은 부모가 우리를 낳은 그 순간에서부터 가 아니라, 창세 전에서 부터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이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 139:13,16)라고.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자신의 형질이 모태에서 이루어지기도 전에 주께서 그를 지목 (!?)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놀라운 성경의 진리이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전”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에 우리를 택하셨다고 더욱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존재의 시작은 부모로부터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도, 어머니의 뱃속에서도 아니요, 세상만물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한가운데 존재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하심을 따라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위대한 건축가가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을 완성했을 때, 한 기자가 ‘당신은 언제부터 이 아름다운 건물의 제작을 시작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가 무어라고 대답할까요? 그 시작점은 적어도 벽돌을 쌓아 나가는 시점도, 더 나아가 땅을 처음파는 기초공사 시점도 아나요, 그가 처음으로 그 건물의 건축작업을 위한 ‘청사진’ (blueprint)을 작성해 나가는 시기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건축물에 있어서 청사진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건물이 웅대하고 정교하면 할수록, 그 건물을 건축해 나갈 ‘기초 설계도’에 해당하는 청사진 없는 건축공사는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도가 우리 성도의 존재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는 이해에 있어서도, 이 ‘건축물의 청사진’의 개념은 잘 적용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시작은 ‘그분이 처음 마음먹으신 시점’이라는 뜻이요, 그 시점은 바로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존재의미는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 출생한 몇 십년 전도 아니요, 어쩌다 우연히도 아니요, 천지가 창조가 되기도 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정확하게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 중요한 것은 사도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받게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오는 본문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존재의 시작’을 밝혀줄 뿐 아니라 ‘우리 구원의 시작’을 동시에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죄의 유전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의 연약함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에 속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자 마음먹으셨는데, 그 마음먹으신 때는 우리 인간이 율법을 아무도 못지키는 것을 보고 나서도 아니요, 그 이전에 첫 인간 아담이 범죄한 순간도 아니요,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성도의 영적 깨닫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제 여기까지 사도가 밝힌 하나님의 위대하신 뜻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첫째가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하심’ (v.4~6)이요 이것은 <선택하심> (election)입니다. 둘째는 ‘아들 하나님의 실행하심’ (v.7~12)이요 곧 <구속하심> (redemption)입니다. 그리고 셋째가 ‘성령님께서 구속의 열매를 적용하심’ (v.13~14)이요, 이것은 곧 성령을 통해 <유업> (inheritance)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과거에 우리를 택하셔서 현재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삼으심으로 미래에 주실 하늘에 속한 유업을 성령을 통해 깨닫고 장차 누려 나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이것이 ‘선하신 하나님의 뜻’ (v.1)이요 ‘그분의 풍성하신 은혜’ (v.7)에 기인한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곧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게 하시고자’함 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가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기 원하는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 (election)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이 ‘택하심’ 곧 ‘선택’은 크게 3가지 형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정통치적 선택’ (theocratic election)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민족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구약시대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서>에서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 7:6)라고 모세를 통해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인류역사에서 민족적인 차원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민족에 한해서 이와 같은 특별한 그분의 택하심으로써 그분의 직접적인 신적 통치를 행하셨던 것입니다.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때, 이것을 ‘구원받은 자녀’라고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아닌 것입니다. 아니 역사적으로 드러나 결과로 본다면 대부분의 이스라엘민족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음으로 구원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밝혔듯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6)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게 된다)” (롬. 9:27)는 것입니다.

둘째는 ‘역할적인 선택’ (vocational election)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그분의 전능하심을 따라서 역할적으로 개인과 집단을 택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레위족속’을 택하셔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사장’의 기능을 감당할 지파로 삼으셨고 (신.18), 구약에서 여러 사사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그의 12사도들을 택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자)” (요. 15:16) 함이라고 밝히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12사도들과 여러 제자들을 세우셔서 그들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그의 제자로써 의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가 구원의 선택’ (salvational election)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v.4) 라는 말씀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들을 구원할 것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44)라고. 사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의 하나임과 동시에 ‘구원이라는 교리’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많은 논쟁과 다양한 이해를 낳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성도 여러분에게 한가지 도전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더욱 온전히 이해해 나가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나의 의견이나 어떤 ‘호불호’를 내려놓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어떤 신학적인 견해로서 접근하기 전에 먼저 성경말씀을 말씀에 비추어서 서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존재의 시작이요, 구원의 출발점임을 믿으십니까?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허락하신 모든 신령한 복을 성령의 충만하심 안에서 넘치도록 지금부터 부어 주실 것을 믿으십니까?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모든 신령한 복을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그 참된 복을 날마다 삶 가운데 풍성히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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