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6, 2020

“푯대를 향하여” (Toward the Goal)

Preacher: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3:12~14
Service Type:

“푯대를 향하여”

(Toward the goal)

2-16-20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pians)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all this, or have already been made perfect, but I press on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Brothers, I do not consider myself yet to have taken hold of i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이 승리와 열매 맺는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은 오늘 말씀에서 그가 선언하듯 푯대를 향하여 인생의 마지막까지 달려간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12절’의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드시고 사로잡으신 구원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붙잡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여러분과 저를 붙잡아 사로잡으심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경계하는 2가지 극단주의가 있습니다.

  • ‘율법주의’ (legalism):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
  • ‘도덕폐기론’ (antinomianism): 영으로만 구원을 받고 육체의 죄악은 상관없다는 것

이런 거짓된 가르침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 사도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서 입니다. 그 부르심의 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 ‘의의 부활’ 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날 육신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영광의 부활입니다.

둘째 ‘천국’ 입니다: 이 천국에서는 모든 성도가 소망하듯이 ‘두 번 다시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상하지도 않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 (계. 7:17)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사도 바울이 온 힘을 다해 펼쳐 보여준 푯대를 향한 삶을 통하여 성령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성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날마다 달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빌립보서의 말씀을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면서 서도 바울이 얼마나 후회 없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았는지를 확인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가 과연 어떻게 이와 같은 열매 맺는 충실한 삶을 살수 있었는 지의 관건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보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거에는 자신과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의 말씀에 대한 오해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열심으로 인해 미워하고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가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약속하신 메시야 이심을 깨닫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는 생명의 구주를 어느 날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주께서 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날도 그는 예수 믿는 자를 색출하고자 다메섹 언덕위를 말을 타고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심히 핍박하고 박해하던 나사렛 예수가 바로 메시야시요,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깨닫은 그날 이후 그는 두번 다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갈 뿐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을 값 주고 사신 그 분을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기를 소망했고, 그를 닮아 가기를 추구했습니다. 언제까지요? 그가 말년에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가서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삶의 푯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날마다 달려 갔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바울이 보여준 귀중한 믿음의 본을 따라 우리 주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성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제가 오늘 말씀에서 먼저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12절’의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that for which also I am apprehended of Christ Jesus) 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에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 (입니다)” 라고 번역하며, <표준새번역>에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드셔서 구원하신 목적이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붙드시고 사로잡으신 구원의 목적이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완전한 사람’ 혹은 ‘온전히 이룸’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주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3장에서 살펴본 데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을 닮는 삶’인데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붙잡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여러분과 저를 붙잡아 사로잡으심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신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에 이르게 하는 것’ 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 크리스챤, 즉 구원받은 자가 살아가는 존재목적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라고요, 그의 온전한 성품으로 날마다 자라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았기에 사도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v.12) 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구원받는 것이 단순히 죄 용서받는 것이 전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죄 용서함 받는 것은 물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듭난 자의 중요한 출발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의 존재이유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출발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죄 용서함 받아 구원받았다면 이제 ‘자라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을 향해서 자라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인정하드시, 그 누구도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 그 목표를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앞에 있는 그리스도의 그 온전하심을 바라보며 달려갈 따름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좇아 가노라” 고 선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러한 달려가는 삶은 바울 한 사람 뿐 아니라, 모든 거듭난 성도, 여러분과 저의 미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말했을 때, 그가 무엇을 잡았다는 말인가? 에 대해 질문하면서 그것을 ‘구원’ 혹은 ‘천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사도 바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이후 보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의 확신 가운데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가며 승리의 삶을 살아갔던 주의 제자를 우리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아직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바울이 말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앞 절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얻었다’ ‘이루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다)’가 무엇인가를 확인했을 때처럼 ‘완전한 사람’ 혹은 ‘온전히 이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고 여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히 이루었다’는 것은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에 다다랐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에 온전히 이루었다고 여기지 아니한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누가 이 땅을 살면서 완전한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바울의 고백에서 집중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는 것 보다도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스스로 만족하여 ‘나는 이미 다 이루었다’라고 한다든지, 혹은 계속해서 달려가지도 않고 ‘나는 도저히 할수 없어’라고 스스로 포기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믿음의 자세는 “ ~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 가노라” (v.13~14)는 것입니다. 스스로 현재의 모습에 자화 자찬하며 만족해 버리거나 혹은 포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계속해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완전한 성품,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이라는 푯대를 바라보며 쉼없이 주님 만나는 날까지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 된 우리 모든 크리스챤들이 평생을 통해 간직해야 할 삶의 자세임을 우리는 바울 사도를 통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거짓없는 고백을 통해서 왜 그토록 간절하게 무엇을 향해 자신이 달려가고 있는지를 큰 그림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그의 생명으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과 마지막 날 그와 함께 누리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2가지 극단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첫째는 <유대주의>입니다. 이것은 ‘율법주의’ (legalism) 혹은 ‘행위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데, ‘행위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고자 하는 거짓 가르침’입니다. 사도는 앞절에서 ‘누가 진정한 할례당인가?’를 논할때 행위주의의 잘못을 밝혔습니다. 둘째는 <완전주의>입니다. 이것을 ‘도덕폐기론’ (antinomianis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들은 ‘죄를 짓는 것은 육신이므로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무슨 죄를 지어도 잘못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 사상은 근본적으로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라는 영지주의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결론은 행위를 의지하는 유대주의나, 영혼만이 선하다는 완전주의나 모두 극단적인 잘못된 가르침인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런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토록 깨어 있기를 경계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29~30)고 사도는 로마서에서 선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하신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신 자들을 죄 용서하심으로 의롭다고 불러 주실 뿐 아니라 점점 더 그분의 온전하신 형상을 본받아 자라남으로 영화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저는 마지막으로 ‘왜 바울 사도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v.14) 바울은 자신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고자’ 좇아간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일까요?’ 그것은 <첫째> ‘의의 부활’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죽은 모든 자들은 마지막날 다시 부활합니다. 이 부활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로 나눠집니다. 먼저, 악인은 안타깝게도 단지 두번째 사망으로 이어지기 위한 무덤에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영생으로 이어지는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허락된 부활의 권능으로 영광스러운 의의 부활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의의 부활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되는 것은 사도가 여러 번 선언 했드시 우리가 ‘마지막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 (빌.3:21)로 부활하게 됨을 그가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죄가 거하는 육신의 옷을 벗고 영광된 형체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부활의 영화는 진실로 사도가 날마다 달려가고자 했던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곧 ‘천국’ (Heaven)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에게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가 아무리 사모하고 추구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상급이 넘치는 곳입니다. 물론 누구도 그곳을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사도 요한과 같이 몇몇 허락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의 영광을 보여주셨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의 언어로는 그 영광과 아름다움을 결코 다 표현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가 천국에 대해 소망하고 고백하는 것은 천국은 하나님의 상급이 넘치는 곳일 뿐 아니라, 상급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는 ‘두 번 다시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상하지도 않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 (계. 7:17)임을 성령을 통해 깨닫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베드로가 주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3번씩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이유는 그가 아직 구원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런 연약한 베드로가 주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의 제자들과 합심해서 기도할 때 성령충만한 강림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불신자에서 신자로 존재가 바뀐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충만하신 능력이 그를 덮었고 그가 성령을 신뢰하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인가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롬.14:17)라고. 바라기는 사도 바울이 온 힘을 다해 펼쳐 보여준 푯대를 향한 삶이 성령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성도 여러분 모두 깨닫게 되는 이 시간되길 소망합니다.

저는 오래전에 제가 공부하던 신학교에서 교수님이 어떤 작자미상의 시를 한편 소개해 주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서’라는 제목의 신앙고백형태의 시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름을 알수 없는 한 그리스도인의 주님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누리는 기쁨과 스릴 넘치는 감격의 삶이 바로 사도 바울의 삶임을 믿습니다. 바울의 삶 가운데 함께 하셨던 동일하신 성령님의 충만하신 역사로 인해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날마다 달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전거를 타고서’ 

 제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때,

주님은 저의 감시자 혹은 심판자처럼 여겨 졌읍니다. 마치 제 잘못된 행동을 추적해서

제가 죽게 되었을때 천국 혹은 지옥에 갈찌를 결정하는 그런 무서운 분 처럼.

 

그러나 그 이후에, 주님을 통해 깨닫게 된 사실은 인생은 마치 자전거타기와 같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혼자서가 아닌, 2인용 (텐덤) 자전거타기 라는 것을.

그리고, 주께서 제 뒤에 앉으셔서 페달을 잘 밟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을.

저는 언제 그분께서 또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하실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음을 저는 앎니다.

 

과거, 제가 저의 인생의 주인이었을 때, 그 인생의 길이

어떻게 진행될지 저는 알았읍니다. 그 길은 예측 가능했으나 지루한 길이었읍니다. 그리고 그 길은

마치 지름길처럼 보였읍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를 인도하기 시작 했을때, 그분은 멀고 험한 산속으로 맹렬하게 빠른 속도의 신나는

여행으로 저를 인도하셨읍니다.

제가 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전거를 꼭 붙들고 있는 것 뿐이었읍니다.

마치 제가 보기에 이제 더 이상 속도를 내선 안될 상황에서도,

주님은 말씀하셨읍니다. “페달을 밟으라!”고.

 

저는 한편 걱정되면서도 호기심에 가득차 주님께 물었읍니다.

“주님, 저를 어디로 데려 가실겁니까?”라고. 그때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다만 미소를 지으셨읍니다.

이런 가운데 제가 배우게 된 사실은 <누구가를, 바로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 이었읍니다.

저는 과거의 지루했던 삶은 모두 잊어버렸고,

신나는 모험의 인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제가 “주님, 무서워요!” 라고 말하면,

주님은 제 뒤에서 몸을 굽히고,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셨읍니다.

 

주님은 저에게 선물을 지어 주어서 사람들에게로 데려 가셨는데, 그 선물은 바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치유>와 <용납>과 <기쁨>이었읍니다.

사람들 또한 제에게 선물을 주어서 저의 여행, 아니 주님과 저와의

“우리”의 여행을 계속 해 나갈수 있도록 도와주었읍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다시 멈춰 섰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읍니다.

“사람들이 준 선물을 버려라. 그것은 필요 이상 많고 너무 무겁단다” 라고.

그래서, 저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나눠줌으로

그 말씀에 따랐읍니다. 그리고, 그 나눠줌을 통해 “주는것이 곧 받는것” 이란 사실을 저는 깨닫게 되었읍니다.

이제 우리의 짐은 가벼워졌읍니다.

 

처음에 저는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읍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생각하듯 저 또한

<내 인생은 완전히 내가 컨트롤 해 나가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죠.

저는 “이러다 주님이 사고 내시는 것 아냐?” 라고 불안해 했읍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셨읍니다. 무엇이 진정 “자전거타기의 비밀” 인지를.

주님은 아셨읍니다. 어떻게 가파른 난간을 따라 핸들을 꺽어야 할지를,

어떻게 험준한 바위 위를 가뿐히 점프할지를, 그리고

어떻게 으시시한 곳을 훌쩍 뛰어 날아 건널수 있는지를.

 

저는 이제 입을 다물고, 묵묵히 페달을 밟는 법을 배워가고 있읍니다. 나의 기쁘신 동료, 그분과 함께

저는 신선한 바람이 내 얼굴을 감싸며 지나갈때 그 짜릿한 기쁨을 점점 더 누려가고 있읍니다.

 

그리고, 제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수 없을때, 그분은 단지 미소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을 믿습니다. “페달을 밟으라!” 고.

 <작자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