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2, 2019

“하나님의 평화” (The Peach of God)

Preacher:
Series: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4:6,7
Service Type:

“하나님의 평화”

(The Peace of God)

9-22-19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pians) 4:6,7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설교 요약]

            우리 인간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는 삶의 무거운 짐 가운데 힘들어 하고 지쳐서 진정한 쉼을 갈구하기 때문일 것 입니다. 이 진정한 평화를 우리는 누릴수는 없는 것 일까요? 복음의 기쁜 소식은 이 평화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요, 바로 하나님의 평화인 것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enjoy the peace of God?) 그것은,

          첫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음”으로써 입니다(By not being anxious about anything):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요.6:26) 고. 염려해서는 않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염려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기 때문 입니다.

둘째,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입니다(By presenting our requests in everything to God, through prayer & petition with thanking)입니다: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수 있는 삶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의 구원하신 자녀들의 모든 기도를 들으실뿐 아니라 신실하게 응답하시기 때문 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이 다스림 받음”으로써 입니다(By being reigned to God through laying down my heart & minds in Christ Jesus):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 (골.3:15) 라고 편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평화는 어떻게 임하는 것일까요?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 (골.3:16)라고 권면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삶속에 풍성히 거할때,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 그분의 평화를 누리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주께 나아감으로 그의 풍성하신 말씀이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통치하실수 있기를 소원 합니다. 그로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평화와 안식, 곧 하나님의 평화를 맛보며 즐거워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 합니다.

 

[설교 전문]

            ‘평화’라는 히브리어는 ‘샬롬’(shalom)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그들이 만나고 헤어질때 서로를 향한 축복과 기원으로 언제나 주고 받는 인사가 바로 ‘샬롬’ 입니다. 서로에게 임할 평화를 비는 것 입니다. 아마도 이 샬롬에 담긴 뜻은 이스라엘의 긴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거치며 가장 간절하게 염원한 것이 ‘평화의 삶’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우리 각자를 되돌아 볼때, 이 평화는 이스라엘민족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의 갈구이기도 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삶은 언제나 욕망과 충동과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불안해하고 삶에 지쳐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무거운 짐 가운데 힘들어 하고 지쳐서 진정한 쉼을 갈구하기 때문일 것 입니다. 바로 진정한 평화를 원하는 것 입니다. 이 진정한 평화를 우리는 누릴수는 없는 것 일까요? 세상이 줄수도 없고 세상이 앗아갈수도 없는 참된 평화를 누릴수는 없는 것일까요? 감사하게도 복음의 기쁜 소식은 이 평화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요, 바로 하나님의 평화인 것 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여러분의 삶이 선하신 하나님의 평화로 충만하시길 축복 합니다.

“악인은 좇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The wicked man flees though no one pursues, but the righteous are as bold as a lion) (잠언 28:1)는 잠언서의 말씀은 묵상할때마다 저의 마음에 깊은 안정감과 소망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그 이유는 내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의 의로운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불러 주시고, 이런 자에게 사자와 같은 담대한 삶을 허락하심을 저는 믿기 때문 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세상이 앗아갈수 없는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를 누림으로서 담대하게 진리 위에 설수 있기 때문 입니다.

오늘 말씀을 본다면 사도바울은 빌립보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불안하고 염려해 할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그들을 격려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빌립보서의 주제라고 할수 있는 <항상 기뻐하라>는 것을 촉구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왜 항상 기뻐할것인가?’의 내용이 오늘 본문말씀이 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감사와 기쁨의 삶을 가져오게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평화’라고 저는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의 지혜와 이해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임할때 여러분과 저는 더 이상 염려하고 불안해 하지 않고 참된 감사와 기쁨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 원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는 감사와 기쁨의 충만한 삶을 가져오게 하는 ‘하나님의 평화’ 가운데 거할수 있을까요? 과연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enjoy the peace of God?) 하는 것 입니다. 그것은,

          첫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음”으로써 (By not being anxious about anything): 우리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수 있을것인가를 가름하는 첫 걸음으로서 사도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v.6a)는 것 입니다. 사실 현대사회와 같은 급변하고 내일을 예측할수 없는 불안한 사회에서 ‘단순히 염려를 적게 하도록 노력하라’는 정도도 아니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는 말은 얼핏 듣기에 따라서는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경솔한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것일까요? 베드로사도는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5:7)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권고하신다’는 말은 보살피고 계신다’는 뜻 입니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즉 어떤 염려도 해서는 않된다고 성도들에게 격려와 도전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너희를 보살피고 계시기 때문이요, 주께서 보살피심으로 지켜주시기 때문이다’고 사도는 우리가 어떤 염려와 걱정도 해서는 않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더욱 구체적으로 염려가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임을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26,31~32) 이 말씀을 통해 주께서 계속해서 강조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지요!왜요? 그 이유는 하늘에 계신 선하신 우리 아버지는 그의 자녀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것을 아실뿐 아니라, 책임져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조차도 풍족히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된 성도들을 더욱 귀하게 여기지 않을것이며, 더욱 책임져 주시지 않겠느냐는 강력한 반문을 하시는 것 입니다. 따라서, 염려는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하나의 매우 심각한 ‘경고사인’ (warning sign)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천지와 만물을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분의 돌보심과 책임지시는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여전히 염려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불신하고 있습니까?

둘째,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By presenting our requests in everything to God, through prayer & petition with thanking): ‘웨스트민스트 신학사전’ 에서는 ‘기도’와 ‘간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먼저 ‘기도 (prayer)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 찬양과 경배, 회개와 감사, 그리고 애원(간구)와 간청하는 것. 이로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 지시하심과 은혜를 경험할수 있다라고 정의 합니다. 그리고 간구 (petition)은 헬라어 원문에는 ‘구하다’ ‘묻다’는 뜻이 있으며, 기도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가 구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서, 애원과 간청으로 구성되 있다라고 신학사전은 정의합니다. 따라서 정리하면, 간구는 기도의 한 부분이 되므로 우리 크리스챤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는 기도를 중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기도를 하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격려합니다. 왜 감사함으로 아뢸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 어떤 기도의 결과에도 실망하거나 절망할것이 아니라 나에게 최선으로 주심을 감사하기 때문일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믿음의 삶은 ‘되어져 가는 일을 다 확인하고 나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그 되어질 일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을 기억 합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 (요한복음/ John 11:41,42) 예수님은 먼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기 이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 감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이요, 또한 언제나 선하게 응답하시기 때문인 것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영적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구원받은 모든 그의 자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 입니다. 때로 내가 바라는데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도 응답임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왜 사도바울이 모든일에 감사함으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될것 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그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시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기도는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온전한 기도 입니까? 아니며 결과를 봐가며 감사할찌 불평할찌를 저울질하는 조건적인 기도 입니까?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이 다스림 받음”으로써 (By being reigned to God through laying down my heart & minds in Christ Jesus):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수 있을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골.3:15) 라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성도의 마음을 지배하실수 있도록 하라는 것 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평화란 그리스도의 영, 성령안에서 누리는 자유함과 영적 안식일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그리스도의 평화는 어떻게 임하는 것일까요?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그 평화를 누릴수 있을찌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3:16) 어떻게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릴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함으로써> (by dwelling the Word of Christ in you richly) 가능한 것 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기도로 그분께 나아가는 것임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몇주전에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를 살펴보면서, 믿음은 맹신도, 내 희망사항을 바라는 것도, 내 강인한 행위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평화는 나의 의지로 염려하지 않겠다는 자기체면이나, 감사하는 행위를 철저히 실천하는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우리속에 거하심으로 시작되는 것 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시는 것 입니다. 이러할때,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저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 줄것임’ (v.7)을 사도바울은 결론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풍성히 거하시도록 날마다 열심을 다해 힘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날마다 순간마다 묵상하고 깨닫은 말씀의 진리에 순종 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여전히 여러분을 무겁게 짖누르는 삶의 무게 가운데 고통하고, 여러분을 얽매는 세상것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삶의 무거운 짐아래 고통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11:28,29) 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평화를 맛볼수 있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 합니다. 베드로의 도전처럼 성도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실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주께 나아감으로 그분의 평화를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 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풍성하신 말씀이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시도록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안식, 곧 하나님의 평화를 맛보며 즐거워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