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7, 2019

“항상 기뻐하라” (Rejoice always)

Preacher:
Series: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4:4,11~13
Service Type:

“항상 기뻐하라”

(Rejoice always)

7-7-19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pians) 4:4,11~13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I am not saying this because I am in need,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whatever the circumstances)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I know what it is to be in need, and I know what it is to have plenty.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whether well fed or hungry, whether living in plenty or in want.)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설교 요약]

            사도바울은 우리 성도들을 향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v.4)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그 극심한 고난의 상황속에서도 성도들을 향해 기쁨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기쁨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며, 그 기쁨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첫째, 사도바울은 이런 기쁨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기 때문> 입니다. 먼저, 사도바울의 삶에서도 처음부터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삶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기 몸의 가시가 떠나기를 주께 3번씩 간구했지만, 주님의 답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12:9)는 것 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한것들을 도리어 크게 기뻐하고 자랑 (고후.12:9,10) 할수 있는 진리를 배웠던 것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 놀랍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족하는 삶”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13)라고 놀라운 고백을 할수 있었던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적응할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 입니다.바로 ‘자족하는 삶’ 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사도바울이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기쁨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님의 충만한 열매> 입니다. 과연 바울과 초대교회 수많은 성도가 누렸던 그 기쁨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 ”(v.4)  그렇습니다. “주 안에서” (In the Lord)에서 기뻐하라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기쁨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 입니다.

이 기쁨은 무엇입니까?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통한 기쁨 입니다. 바로 성령의 충만한 열매를 통한 기쁨 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고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밤 제자들에게 충만한 성령을 통한 기쁨의 삶을 약속 하십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이 항상 주님 안의 거함으로 약속하신 성령님의 충만한 열매를 거두는 기쁨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 합니다.

 

[설교 전문]

            사도바울은 우리 성도들을 향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v.4)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의 심각한 고민이 있다면, 사도바울 뿐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누렸던 기쁨과 감사를 누리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이 줄수없는 기쁨, 세상이 만들수 없는 기쁨이 항상 넘쳐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의 삶되시길 기대합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 있으면서 빌립보성도들에게 편지한 짧은 서신 입니다. 그러나, 그가 영적으로 주는 강력한 사랑의 격려와 도전은 그 짧은 서신이 도리어 배가되어 큰 감동과 도전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다가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v.4)는 말씀은 오늘 본문말씀 뿐 아니라, 빌립보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사도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습니다. 요즘처럼 인권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이곳 미국이나 한국등 몇몇 민주 자유주의 국가가 아니라, 더욱이 2000여년전 아직 기독교회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주님의 제자들이 당한 고난과 핍박을 우리중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 극심한 고난과 차가운 감옥안의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사도바울은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기쁨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아니, 기쁨이 그 속에서 차고 넘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사도바울은 지금 기쁜체 하는 것일까요? 그는 지금 연기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며 도데체 그의 기쁨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며, 그 기쁨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첫째, 사도바울은 이런 기쁨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기 때문> 이라고 사도바울은 고백 합니다. 먼저, 우리가 그의 서신을 읽어보면 사도바울의 삶에서도 처음부터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삶만 있었던 것은 아님을 추측해 볼수 있습니다. 그가 고린도성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자기 몸의 가시가 떠나기를 주께 3번씩 간구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12:7,8). 그 가시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그로인해 사도바울자신도 많이 힘들어하고 때로는 주님을 원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답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12:9)는 것 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약한것들을 도리어 크게 기뻐하고 자랑했음 (고후.12:9,10)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이 놀라운 진리를 배워 나가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배운만큼 더욱 기쁨을 누리게 된 것 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요, 놀라운 역설임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몇주전에 예수님께서 ‘한알의 땅에 떨어진 밀알’의 비유를 통해 “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는 진리로 제자들에게 도전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것은 ‘내 자아와 육에 속한 탐심이 죽어질때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게 될것’임을 약속하신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기뻐하고 자랑할것은 ‘내가 스스로 강하고 멋있고 믿음직스러운것이 아니라, 약함과 부족과 자격없음’을 깨닫고 인정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는 것 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자아와 자만과 내 자랑을 모두 죽이고, 내 약함을 도리어 자랑할때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고후.12:9)는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할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는 자신이 약할 그 때에 곧 강하여지는(v.10) 놀라운 기독교의 역설을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경험하고 누리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성도들에게 기쁨에 삶을 살기를 도전하는 것은 얼마 있지 않아서 크리스챤들의 처우가 개선되고 살기가 좋아질 것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해 받는 핍박과 곤란과 모욕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 (v.10) 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넘치게 될것이기 때문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탁월한 성경교사와 설교자로서 말씀을 통해 잘 풀어 해석해줄 뿐 아니라, <자기자신의 삶을 통해 놀랍게 간증>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양무리의 목회자이자 먼저 부름받은 주님의 몸의 한 지체로써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간증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자족하는 삶” (the life of contentment)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v.13) 라고 사도바울은 놀라운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그동안 저는 수없이 들어오고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구절을 자기 나름데로의 방식으로 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의미와는 관계없이 잘못 적용하고 있음을 저는 발견 하곤 합니다. 특히 여러 교회들에서는 ‘총동원 전도주일’에 큰 현수막을 교회건물 벽에 이 말씀을 단골메뉴로 사용 합니다. 주께서 능력 주셔서 전도 많이 하자는 것 입니다. 혹은 자신의 계획이나 노력이 반드시 성취되기 소원하는 굳센 믿음으로 이 말씀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잘못됐다고 할수는 없겠으나, 원래 사도바울이 이 서신을 쓸 당시의 의미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고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13)라고 놀라운 승리의 고백을 할수 있었던 것은 이것 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주 안에서 ‘일체의 비결’ 즉,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적응할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 입니다. 그 비결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가난하게 살든지 혹은 부유하게 살든지, 혹은 배가 부르건 배가 고프건 관계없이 모든 상황 가운데서 만족할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바로 ‘자족하는 삶’ 입니다. 어떻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관계없이 만족할수 있는 사도바울의 ‘일체의 비결’이 놀랍게 느껴집니까? 아니면 별것 아닌것 같습니까? 이것은 실로 놀랍고 강력한 비결이요, 능력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은 내가 어떤 상황을 바꾸고자 노력하기 이전에 내 자신이 <나의 관점과 가치관>을 바꾸는 것 입니다.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만족을 발견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인 ‘자기최면’이나 ‘긍정적 사고방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도바울의 이러한 만족의 비결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이해하기 때문 입니다. 바로 그는 이 모든 환경을 통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고  로마서에서 그가 깨닫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는 자들은 단순한 자기최면이나 긍정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만족하고 기뻐할수 있는 것 입니다. 말로가 아니라 삶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사도바울이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기쁨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님의 충만한 열매> 입니다. 과연 바울이 누렸고, 초대교회 수많은 성도가 누렸던 그 기쁨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말씀이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v.4)  그렇습니다. 바울은 우리 성도가 기뻐해야 할 내용에 대한 분명한 가이드라인을 정해주고 있는 것 입니다. “주 안에서” (In the Lord)에서 기뻐하라는 것 입니다. 내 인간적인 사고와 내 철학 혹은 세상의 가르침이나 평가에 따라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기쁨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 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밤 제자들에게 왜 자신의 ‘말씀 안에’ 곧 ‘사랑 안에’ 거하라고 도전 하신지에 대한 이유인 것 입니다. 그의 말씀과 사랑 안에 거할때 기쁨의 삶이 가능하기 때문 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 가능할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써’ (요.15:10) 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약속하시는 것 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1)고 말입니다.

이 기쁨은 무엇입니까?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통한 기쁨 입니다. 바로 성령충만을 통한 기쁨 입니다. 이것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요.15:4)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행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기쁨을 충만케 할것을 약속하신 이유일 것 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고 주님은 약속 하십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통해 주실 기쁨의 삶 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성령의 열매로 충만한 삶 입니다 (갈.5:22,23). 이런 성령충만의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적인 상태임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즐거움이라” (롬.14:17)이라고.

이제 우리가 ‘무엇이 기쁨충만의 상태인지?’를 이해 했다면, 제가 성도 여러분에게 마지막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 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기쁨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는 것 입니다. 만약 현재 이런 기쁨의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 입니까? 우리가 이런 충만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각자 다를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의지가 약해서’ 혹은 ‘신앙적인 동기가 부족해서…’라고 각자의 이유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공통점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주 안에서’ 살지 않고 있다는 점 입니다. 무엇이 ‘주 안에서 있다’는 뜻 입니까? 주님은 그것은 바로 ‘주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뜻이요 또한 ‘주의 사랑 안에 거한다’ (요.15:7~9)는 뜻임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서 주님과 더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나간다는 뜻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그분의 말씀과 사랑안에서 주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인격적인 관계’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는 것 입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나의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결정’을 전제로 한 표현 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나간다는 의미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뜻임을 저는 여러시간 강조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의 관계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닌 것 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는 나의 자발적인 ‘지정의’, 전 인격적인 반응을 통해 점점 더 발전하고 깊어지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그의 사랑 안에서 자라감으로서 그분과 더 깊은 인격적 관계로 나아가기를 원 하십니까? 그렇게 노력 하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이것을 원한다면, 사도바울의 놀라운 도전과 같이 ‘대체로’ 나 ‘대부분’이 아니라 ‘항상’ ‘언제나’ 만족하고 기쁨에 넘치는 놀라운 삶이 시작 될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참포도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음으로서, 그 분의 말씀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서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 합니다. 약속하신 성령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함으로 허락하신 성령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삶 사시길 기도 합니다. 이를 통하여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불평하거나 불만하는 삶이 아니라, 자족하고 기뻐하고 감사로 항상 충만한 삶을 살아가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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